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추적 (Sleuth, 2007)



마이클 케인과 주드 로가 주연인 리메이크 영화라는 것까지는 그냥 그랬는데 감독이 케네스 브래너라고 해서 관심이 갔던 영화입니다. 케네스 브래너 하면 역시 셰익스피어 원작의 많은 영화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는 케네스 브래너 자신과 엠마 톰슨이 주연했던 <환생>(Dead Again, 1991)이었습니다. 이제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 노인이 된 앤디 가르시아가 목구멍으로 담배를 피우던 끔찍한(강력한 금연 광고?) 모습 외에는 거의 기억나는 장면도 없지만 그 영화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보았었다는 기억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케네스 브래너는 시대극 보다는 '현대물의 연출자'로서 저에게 확실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그런 실력을 자주 발휘하고 있지는 않는 편이지만요. <추적>은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1994년작 <프랑켄슈타인> 이후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케네스 브래너의 감독 작품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소니 쉐퍼의 희곡을 원작으로 해서 처음 만들어진 1972년작 <추적>< 발자국>에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젊은 마이클 케인이 출연했었고요, 그 마이클 케인이 2007년 리메이크 영화에서는 부유한 추리 소설작가 앤드류 와이크를 연기하고 그가 과거에 연기했던 젊은 마일스 틴들은 쥬드 로가 연기하고 있습니다. 크리딧을 보면 두 배우 외에도 3명의 출연자가 더 있는데요, 먼저 이번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해롤드 핀터는 TV 드라마 속 인물로 잠시 출연합니다. 그리고 케네스 브래너는 얼굴도 비춰지지 않는 그 상대역으로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앤드류의 아내이면서 마일스의 애인인 매기 역으로 카르멜 오설리반이 역시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잠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추적>은 마이클 케인과 쥬드 로, 딱 2명의 배우만이 등장하는 작품이라는 것이죠.

<추적>은 희곡으로 처음 씌여졌던 연극적인 특성이 장점이자 단점으로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장점이라고 하면 역시 두 배우의 명연기를 100%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겠지요. 배우들을 위해 씌여진 작품인 만큼 배우들의 연기력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배우가 잘하면 작품이 살고 배우가 제대로 못하면 작품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인 겁니다. 사실 마이클 케인과 쥬드 로 주연의 영화라는 건 그리 썩 매력적인 요소는 못됩니다. 마이클 케인이 훌륭한 연기자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언제나 조연으로서 한발자욱 물러선 모습만 봐왔던 탓이 있을테고요, 쥬드 로의 경우 영국이 낳은 꽃미남 배우로서 한 때 엄청나게 잘 나갔던 때도 있었습니다만 최근엔 확실히 '예전만 못한'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추적>을 보면 이제껏 갖고 있었던 두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이제껏 자신을 조연으로만 캐스팅해왔던 영화계 사람들에게 시위라도 하는 듯한 마이클 케인의 연기는 정말 그 자체만으로도 스펙타클입니다. 그리고 쥬드 로 역시 그가 왜 이 영화의 제작자로 직접 나섰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줄 만큼 대단한 연기력을 과시합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 배우로서 자신의 진가를 입증하는데에 <추적>의 마일스 틴들 역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기회였겠지요.




2인극으로 씌여진 희곡을 원작으로, 연극적인 분위기를 잘 살려 연출된 <추적>에게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만한 부분은 역시 스케일이 작고 이야기의 전개나 감정의 흐름에 '매우 연극적인 비약'이 있다는 겁니다. 뮤지컬에 나름의 문법이 있듯이 연극에도 나름의 형식미라는 것이 있을텐데요, 이것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다수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와 어긋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추적>이 희곡 원작의 2인극이라는 사실을 모른채 '마이클 케인과 쥬드 로 주연의 영화'로만 알고 보는 관객들 가운데 일부는 분명 조직의 보스와 그의 아내를 사랑한 젊은 남자의 대결을 그린 액션 스릴러 영화 정도로 기대했던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제 뒤에 앉았던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건 TV로나 봤어야 할 영화잖아' 하시더군요) 그러나 연극 무대와 같은 작품의 형식미에 적응할 수 있는 관객이라면 오히려 두 배우의 불꽃 같은, 아니 불을 뿜는 활화산과 쓸쓸한 초원 지대를 오가는 팔색조 연기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팔색조 연기가 두 명이니까 십육색조인가요 육십사색조인가요.

<추적>에 다른 제목을 붙여본다면 <게임> 정도가 적당하지 싶습니다. 3차례에 걸친 두 주인공 간의 게임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도 하지만 결국엔 관객과의 게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이니까요. 영화가 관객에게 게임을 걸어오게 되면 사실은 영화의 트릭에 넘어가주는 것이 관객 입장에서는 즐거운 경험이 됩니다. 제 경우 앤드류와 마일스의 두번째 게임에서 정말 감쪽같이 속고 있다가 거의 막판에 가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영화가 더욱 재미있고, 그 게임의 승자를 연기했던 쥬드 로의 연기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마지막 세번째 게임에서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이런 류의 게임이 항상 그렇습니다만 결국 모두가 패자로 남는 게임이었던 거겠죠. 굳이 승자를 하나 꼽으라면 '진실'이라고나 할까요. 진심과 위선을 오가며 게임을 벌이던 두 사람은 결국 진실 앞에서 더이상 참을 수 없는 굴욕감에 무너져내린 것이라 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영화관 안에서는 <추적>을 만든 이들과 이 영화를 즐겁게 감상한 관객들 역시 나름의 승자라고 할 수 있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