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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북극의 연인들 _ 우연과 운명의 러브스토리



북극의 연인들 (The Lovers From The North Pole, Los Amantes Del Circulo Polar, 1998)
우연과 운명의 러브스토리

이 영화는 <섹스 앤 루시아>를 연출했던 훌리오 메뎀 (Julio Medem Lafont)의 1998년 작입니다. 1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국내에는 올해 12월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개봉하게 된거죠. 사실 큰 관심이 있던 영화는 아니었는데, 친한 블로거 분이 오프라인에서 전해준 '괜찮다'라는 말과 급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에 끌렸달까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바람은 <북극의 연인들>이라는 영화를 보기에 탁월한 환경조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극장 내가 추웠던 것도 아니었는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입고갔던 코트를 벗지 않고 관람했거든요.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운명적 사랑' '영원한 사랑' '특별한 운명이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등 러브스토리에서 엿볼 수 있는 대부분의 홍보문구들이 즐비한 영화였기에, 뭐 그런 뻔한 영화겠구나 하는 짐작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 놓친 사실이 있었다면 바로 스페인 영화라는 점이었겠지요. <섹스 앤 루시아>는 예전에 얼핏 본 것 같은데 제대로 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훌리오 메뎀 감독의 영화라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었고, 스페인 영화라는 점이 유일하게 이 영화에 무언가 특별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요소였죠.

스포일러 없이 간단하게 추천의 글과 결론을 내어보자면, 이 영화 이 계절에 보기에 참 좋은 영화입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홍보 문구들처럼 이야기자체는 클리셰 가득한 러브스토리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재밌는건 영화를 볼 때는 이 이야기가 전혀 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단 한번도 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극장을 나오면서 생각해보니 이야기가 너무 전형적이라는 생각이 나중에 든거죠. 그만큼 이 영화는 흔한 러브스토리의 클리셰들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루하기는 커녕, 관객으로 하여금 집중 또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비슷한 설정의 다른 영화들 사이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작품이기도 했구요.



(<북극의 연인들>은 결국엔 러브스토리이긴 하지만, 오토와 어머니의 관계가 제법 비중있게 그려집니다. 오토의 성장영화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요.)

시놉시스

우연과 필연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영원한 사랑...

끝이 시작이 되는 순환적인 구조 속에 두 연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마치 직소퍼즐처럼 짜넣은 더없이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주인공 아나와 오토는 8살 때 처음 만나 영혼의 교감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 오토의 아버지와 아나의 어머니가 결혼하는 바람에, 아나와 오토는 비밀스럽고 고통스러운 사랑을 간직하게 된다. 많은 우여곡절로 서로를 떠난 두 사람은 25살이 되어 북극권의 가장자리 핀란드에서 다시 만나지만, 이들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데뷔작부터 줄곧 반복과 순환 구조에 몰두해온 메뎀의 관심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 감독 자신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회문(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은 단어, Medem, Ana, Otto)인 이름을 가진 두 주인공의 사랑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시간에 대한 성찰을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오토(Otto)와 안나(Anna)는 어린 시절 부모님 덕에 서로 알게 된다. 그들의 이름은 거꾸로 읽어도 같은 이름이다. 이 영화는 그들의 순환적인 이름처럼 백야로 해가 지지 않는 곳에서 만나게 되는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삶에 관한 영화다. 결코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사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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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만 다시 읽어보아도 이 영화를 선뜻 선택하게 되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첫 장면만 봐도 엔딩까지 쭈욱 예상이 되는 영화로 보이니까요. <북극의 연인들>은 결론은 이 예상과 맞아떨어지는데, 보는 과정에서는 눈치 채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첫 번째로 영화를 그리는 독특한 방식을 들 수 있겠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로 입장을 바꿔가며 마치 다른 이야기처럼 그리는 방식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10년 전에도 그리 새로운 방식은 아니었겠지요?;;;), 훌리오 메뎀 감독은 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토와 아나의 이야기를 오가다가 결국은 둘이 아닌 하나의 장소로 귀결되어 지는 구성 방식은, 단순히 같은 얘기를 다른 시각으로 반복하는 것을 넘어서서, 전개 방식 그 전부로 사용되고 있는거죠.




(이 영화에는 아역과 청소년기, 성인으로 같은 인물이 세 명의 배우에 의해 그려지는데, 3명 모두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아이들의 깊은 눈빛은 너무 인상적이었구요. 스페인 아이들의 마스크나 분위기는 언제봐도 매력적인것 같아요.)

남녀 주인공의 이름은 각각 오토(otto)와 아나(ANA)인데,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은 회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는 영화의 내용상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기도 한데, 영화의 구성 측면에서도 이 '회문'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즉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동일하다는 얘기인데, 최근에는 스릴러 장르의 미드에서 자주쓰곤 하는 이 방식이 이 영화에서는 클리셰를 보완하는 영화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 핸드 헬드로 촬영된 흔들리는 화면과 주인공들의 흥분된 표정들은 긴장감만으로 다가오지만, 마지막에 이 장면이 반복될 때에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죠. 분명 첫 장면에서 이미 다 본 장면들이지만 마지막에 다시 볼 때는 사뭇 궁금해하며 장면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1시간 쯤 전에 장면이 기억이 나질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도록 잘 연출한 영화의 묘라 해야겠죠.

이 영화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핀란드 시골 마을의 고요한 풍광과 더불어, 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적인 장면 장면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일단 온종일 해가 지지 않는 인적 없는 호수가에 자리한 집의 풍경은 이 영화의 제목이 '북극의 연인들'이 되어버린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일정 시기에 해가 지지 않는 곳이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더불어 고요함과 더불어 불안함도 전달해내는 이 공간이 주는 느낌은 영화의 주인공들 만큼이나 오래 기억될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사춘기를 겪을 때 집과 집 주변의 묘사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어두워진 밤 시간에 창문 밖으로 나무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최대 명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네요. 두 주인공의 긴장되고 떨리는 심정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지로 표현해낸 이 장면이야말로 훌리오 메뎀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핀란드 시골 마을의 그 아름다운 풍광보다도 이 장면이 더 인상깊고 기억에 오래 남을듯 하네요.




이 영화를 '아름다운'영화로 기억되게 하는 다른 이유는 바로 '아름다운' 배우들과 캐릭터 일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남녀 주인공인 오토와 아나는 각각 3명의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데, 일단 아역을 맡은 두 배우는 최근 개봉했던 <렛 미 인>의 오스칼과 이엘리에 버금가는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오스칼과 이엘리는 영화를 시작부터 끝까지 이끌어 갔던 캐릭터였고, <북극의 연인들> 아역 배우들의 경우는 그야말로 아역에만 등장했다는 점에서 이 두 명의 아역 배우의 인상이 얼마나 깊었나를 가늠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어린 오토 역할을 맡은 페루 메뎀은 그 깊고 불안함이 가득한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는데(보는 내내 <바벨>에 등장했던 그 총쏘던 아이가 연상되더군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독인 훌리오 메뎀의 아들이더군요. 어린 아나 역할을 맡은 사라 발리엔테 역시 매우 인상깊습니다. 어린 아이임에도 마냥 어린이스럽지 않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이 두 어린이들의 인상과 연기는 <북극의 연인들>을 보는 또 다른 감상 포인트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청소년기를 연기하는 두 배우도 인상적인데, 특히 아나 역을 맡은 크리스텔 디아즈 (Kristel Diaz)의 투명한 마스크와 신비스런 표정연기는 너무도 매력적입니다. 뭐랄까요 청소년기의 소년들을 자극하는 신비스런 표정을 갖고 있는 소녀랄까요. 그런데 이 이후로 자국에서 두 작품 정도 더 출연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이렇다할 정보나 사진을 찾을 수가 없네요. 저 정도 마스크와 분위기라면 충분히 주목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마저 드는군요.

성인 오토와 아나를 맡은 두 배우, 펠레 마르티네즈와 나즈와 님리는 <오픈 유어 아이즈>를 통해 조금 낯이 익은 배우들이었습니다(물론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페넬로페 크루즈 였지만요 ;;;). 이 두 배우의 연기도 물론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역과 청소년기를 연기한 배우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탓에, 이들에 대한 코멘트는 여기서 줄이도록 하죠.




10년만에 국내에서 정식 개봉이 된 만큼 신선도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라는 우려도 아주 조금 있었지만, 이러한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켜버린 아주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사실 시놉시스만 보면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절절하지 않으면서도 여운이 깊게 남고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올 겨울 극장가에서 단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북극의 연인들>을 꼽을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