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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그녀의 웃음을 지켜주세요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그녀의 웃음을 지켜주세요


UK; 2008; 118min; 35mm; Color
Directing: Mike Leigh
Casting: Sally Hwakins, Eddie Marsan, Alexis Zegerman
 
고등학교 때부터 오래 만난 한 친구가 있다. 눈만 잘못 흘려도 금세 욱하는 질풍노도 아이들이 들끓는 학교에서 그 친구는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실없는 그의 웃음이 나름의 생존 방법이려니 했다. 남자가 되어가는 아이들이 보통 그러하듯 치열한 서열다툼이 벌어지는 그 곳에서 애초 한 걸음 물러선듯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잘 웃고 잘 들어주는 그 친구의 주변에는 항상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웃는 얼굴에 끌렸던 것인지, 아니면 부담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둥글둥글한 성격의 그 친구는 반 누구와도 잘 지냈다. 심지어 괴롭힘에 가까운 심한 장난을 하는 친구에게도, 귀찮은 부탁을 하는 친구에게도 그 친구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항상 웃는 낯으로 대했다. 누가 봤으면 장난을 즐기고 있는지 알았을지도 모른다. 언뜻 보기에 그 친구가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고, 세상사 고되고 힘들고 버거운 일은 존재하지 않은 듯 보였다. 하긴 그 친구의 웃음이 왠지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나도 그 친구에게 많이 기댔으니 말이다.

한날은 너무 답답해 그 친구에게 물었다.
"넌 왜 맨날 웃니?"
"내가 웃지 않으면 인상이 워낙 험해서..."
"꼭 인상이 좋아야 하나? 꼭 억지로 웃으면서 모든 걸 그렇게 다 받아줄 필요는 없짆아..."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그 친구는 애해매게 답을 피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보며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그 때 난 분명히 그 친구의 그런 웃음을 '억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싫은 장난을 받아도, 귀찮은 부탁이 들어와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받아들이니 내심 그 친구가 안쓰럽기도 했다. "저 친구는 저렇게 웃는게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 정도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20대를 지나며 천천히 알게 됐다. 학교에서 벗어나 전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삶의 방식이 각양각색이라는 소소한 진리를 늦게서야 알게 됐다고 할까. 내가 친구에게서 '희생' 아니면 '억지'라고 느꼈던 부분들은 그저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관점이었다. 친구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사는 방법을 나름대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거기에 내가 옳다 그르다 평가할 여지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친구로부터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아왔는지를 몰랐던 것 같다. 내 부탁을 들어주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내가 옳다고 말해주는, 그리고 항상 웃어주는 그 친구를 옆에 두고 알게 모르게 많은 힘을 얻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20대가 겪어야 하는 평범한 경험들을 하며 30을 바라보는 나이에 가까이 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친구에게서 예전의 웃음을 좀처럼 찾기 힘들다. 전처럼 많이 웃기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쓴 맛이 느껴진다. "점점 내 인생이 조연이 되어 가는것 같아.... 주연이 아니라..." 한날 차를 마시면서 무턱대고 그가 던진 말이었다. 그 무거운 말은 하면서도 그 친구는 웃고 있었다. "뭐가 저 친구를 저렇게 지치게 했을까, 저 친구의 웃음을 망쳐놨을까?"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잘 모르겠지만 분명 주변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하긴 살면서 사람한테 상처받는 게 한 두번이랴. 타인에게 애초에 기대가 없는 사람들도 속이 쓰린 법인데, 친구는 왠지 더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나 역시 끊임없이 친구에게 "솔직해져라, 너 자신을 좀 지키라."고 말하면서도 나에게만은 늘 웃어주길 바랐다. 내 얘기를, 내 주장을 들어주기를 바라고 고개를 끄덕여주기를 바랐다. 더구나 그 친구 주변에 나같은 사람이 한둘이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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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리 감독의 신작 <해피 고 럭키>의 주인공 포피는 여러가지로 내 친구를 생각나게 했다.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잃어버리고서 "작별인사도 못했는데..."라며 시종일관 웃는 것도, 필요 이상으로 오지랖이 넓은 것도, 심지어 진지해야 할 순간에 진지하지 못한 것 까지도 말이다. 친구와 포피는 영화의 제목 Happy-go-lucky처럼 심하게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조어 형태가 참 재밌다. "행복하면 운이 따른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기존의 행복과 행운의 인과관계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것이다. 대부분 좋은 일(행운)이 생겨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행복해서 운이 생긴다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곧 'Happy-go-lucky'는 통념에 대한 전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포피가 '해피 고 럭키'를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그녀를 통념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인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30살의 초등학교 선생님을 직업으로 가진 여성> 포피를 대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 문장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전형적인 이미지(통념)들이 있다. 단아하고 인자한 외모와 모범적인 생활습관, 그리고 비슷한 사람과 결혼을 했거나 앞두고 있는 안정적인 모습들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하지만 포피는 그렇지 않다. 때로는 아이들보다 유치하고, 독특한 패션 감각을 자랑하고, 클럽에서 밤을 세며 노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개성 넘치는 인물이다. 더구나 남편은 커녕 레즈비언이라고 의심 받으며 친구와 동거동락하고 있다. 이런 포피를 바라보는 것이 불편한 것은 우리의 시선이지 절대 포피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니다. 포피는 항상 자신의 삶에 만족해왔고,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사람에게도, 허리가 아파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때도 그녀는 밝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Happy-go-lucky한 그녀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동생 수지와 운전강사 스콧이다. 수지는 언니 포피의 인생과 판이하게 다른 삶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모범적이고 안정적이다. 자상한 남편이 있고, 뱃속에서는 곧 태어날 아이가 자라고 있다. 화목한 가정과 직업 그리고 미래를 위한 연금까지 보장된 수지의 인생은 큰 굴곡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런 수지의 시선(우리의 시선이기도 하다)에 언니 포피의 삶은 뭔가 결핍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때문에 수지는 언니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빨리 정상 궤도로 돌아올 갈 것을 강요한다. 행복의 조건이 고정된 것이 아님에도 수지는 다른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수지에 비해 포피의 운전강사 스콧은 좀더 복잡한 캐릭터이다. 뭔가 사연 많아 보이는 이 남자는 끊임없이 "엔라하"를 외치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말투에는 항상 짜증이 가득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도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런 그에게 포피가 나타난다. 부츠를 신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고, 화를 내도 시종일관 웃으며 농당으로 되받아치는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상한 여자다. 그런데 스콧은 이제껏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포피의 웃음과 농담에 계속 신경이 쓰이고, 관심을 갖게 된다. 왠지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애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저 포피의 일관된 '행동'임을 알았을 때 스콧의 분노는 폭발한다. 그에게 포피는 결국 '이상한' 여자였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포피는 룸메이트 조이와 뱃놀이를 한다. 넓은 호수를 움직이는 그녀들의 배는 마치 소통이 어려운 그녀들만의 세계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포피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해 쌓아두었을 법한 답답한 속내를 비친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지 어느 틀에 맞추지 않고 지극히 '낙천적'인 자신의 삶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뿐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포피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그저 롱테이크로 호수를 따라 움직이는 그녀들의 "작은 세계"를 비출 뿐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때 포피의 표정은 아마도 얼마 전 내가 친구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이 더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난 친구의 모습에 짜증이 나면서도, 끊임없이 그에게 기댔고 그를 필요로 했다. 포피를 보면서도 그랬다. 그녀의 행동이 영화속 총천연색 화면처럼 모두 예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더러더러 짜증도 났고 이해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에게 그랬듯 그녀가 웃음을 잃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친구도 포피도 그 웃음을 계속 지켜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웃음을 지켜주는 것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나의 몫도 될 것이다. 나의 '엔라하'로 그들의 '엔라하'를 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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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피는 함께 하는 친구가 있고 금방 시작한 사랑도 있다. 그녀의 고민이 길지 않길 바란다.


 
<진실과 거짓말>, <베라 드레이크>를 만들었던 영국의 마이크 리의 신작 <해리 고 럭키>는 개봉 전부터 여러 영화제에 소개되며 입소문을 타고 있던 영화였다. 아기자기한 포스터 속 포피의 표정과 낯간지러운 카피들이 마치 영국판 아멜리에를 연상시키지만 영화는 의외로 굉장히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가볍지 않은 이야기가 자칫 팬시한 화면과 잘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포피를 연기한 샐리 호킨스의 호연 덕에 멋진 앙상블을 이뤄낼 수 있던 것 같다.


P.S. 포피를 보면서 이윤기 감독의 <멋진하루>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병훈'도 생각났다. 둘다 대책없이 낙천적인 캐릭터다. (병훈이 더 심하긴 하지만...) 하지만 <멋진하루>에서 병훈이 마지막 희수를 웃게 만든 반면 <해피 고 럭키>의 포피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멋진하루>는 무거우면서도 희망적이었고, <해피 고 럭키>는 가벼우면서도 묵직했다. (두 영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두 감독이 서로의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