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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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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선가 <미쓰 홍당무>(2008)의 양미숙(공효진)과 비교하며 마찬가지로 '전대미문의 캐릭터'라고 표현했더군요. 언듯 포스터와 헤드카피만 놓고 봤을 때는 오드리 또뚜 주연의 <아멜리에>(2001) 와 비슷한 영화 같아 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비밀과 거짓말>(1996)의 마이크 리 감독이 홍보 문구처럼 마냥 행복해지기만 하는 영화를 만들었을 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예상이 맞았습니다. 메가박스의 유럽 영화제에서만 소개되고 결국 국내에서는 개봉이 안된 <베라 드레이크>(2004) 이후 4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어서인지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진행되는 건 맞습니다만 이번 작품에서도 '도무지 연기하는 것 같지 않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앞세워 후반부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건 여전하시더군요. 충격적인 반전이나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갑작스럽게 밀려든 강도 높은 긴장 때문에 마치 머릿속을 표백제로 빡빡 문지른 듯이 하얗게 되어버렸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낙천적이고 엄청나게 쾌활한 성격의 초등학교 선생님인 주인공 포피(샐리 호킨스)를 내세워 언듯 행복하게 사는 비결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영화의 메시지는 남들과 행복하게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역설하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Happy-Go-Lucky라는 제목도 단순히 행복과 행운이 함께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주 운이 좋아야 행복할 수 있다, 또는 행복한 것인줄 알았는데 운이 좋은 것이었다는 뜻으로 보일 지경이니까요. 영화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자잘한 에피소드를 모두 제외하게 되면 남는 것은 포피라는 여성이 운전 교습을 하다가 강사와 대판 싸웠다는,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수 있고 또 살면서 한 두 번 이상은 경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진작에 피해갔었을 곳까지 포피는 좀 더 갔을 뿐이고 그로 인해 커다란 감정적 갈등가 깨달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영화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면서(그 목적지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관객들이 미리 대비하지 못하도록) 대부분의 시간을 포피의 캐릭터를 설명하며 가벼운 웃음을 주는 데에 할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포피의 타고난 성격이라기 보다는 그녀가 가진 이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다가 해가 저문 시각에 뜬금없이 외진 곳에 홀로 있는 부랑자에게 다가가 소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언듯 잘 이해가 안되는 행동입니다만 이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허리가 아파 찾아간 물리치료사에게 도움을 받았듯이, 그리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듯이 포피는 다른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고 또 해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포피에게 마침내 큰 기쁨과 갈등이 동시에 찾아오게 되는 데요(사실은 그 기쁨도 갈등에 큰 불을 놓는 장치로서 활용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겠죠) 자신의 노력이나 의도와는 달리 도무지 넘을 수 없는 큰 오해와 갈등의 벽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죠.




<해피 고 럭키>가 마음에 드는 점들 가운데 하나는 주인공 포피의 캐릭터가 아무 생각없이 헤헤거리기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쾌활하고 낙천적이었을 뿐 현실에 맞부딛혔을 때 웃음을 거두고 취한 행동이 무척 바람직하더군요. 마침내 찾아온 행복 끝에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통속 드라마가 아닌 바에야 배울 것은 배우고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오는 것이 맞는 거겠죠. 그리하여 포피가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버리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현실적인 한계를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건 때로는 좌절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뿐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해피 고 럭키>의 압권은 역시 도로연수 강사 스콧(에디 마샌)의 대폭발이죠. 샐리 호킨스의 연기도 천연덕스러워서 좋습니다만 <베라 드레이크>에서 수줍은 성격의 사위로 출연했던 에디 마샌의 메소드 연기는 이 영화를 '역시 마이크 리'라는 탄성이 나오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른 영화들에서도 이따금 눈에 띄지 않는 단역을 맡아 출연하곤 했었는데 역시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속에서 완전히 펄펄 날았습니다. 11월에 본 영화들을 정리하면서 <해피 고 럭키>를 봤더라면 <렛 미 인>(2007)의 리나 레안레드손이 아닌 샐리 호킨스를 최고의 여자배우로 꼽게 되었을까 했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최고의 남자배우를 <추적>의 두 배우가 아닌 에디 마샌으로 꼽았어야 했다는 생각마저 드네요. 개인적으로는 플라멩고 교습 장면이 참 좋았는데 영화 중반 이후로는 더이상 나오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영국 액센트의 홍수 속에서 플라멩고 강사의 스팽글리쉬도 무척 재미있더군요. 돌이켜보면 어느 장면 하나 헛되이 들어간 것이 없는, 거장의 원숙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