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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북극의 연인들> 우연과 운명 그리고 유한과 영원

<북극의 연인들> 우연과 운명 그리고 유한과 영원

Spain, France; 1998; 108min; 35mm; Color
Directing: Julio Medem
Casting: Najwa Nimri, Fele Martinez, Maru Valdivielso, Nacho Novo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눈의 여왕>이라는 작품이 있다. 국내에서는 <인어공주>, <미운오리새끼> 등에 비하면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2006년 현빈과 성유리가 주연한 동명의 KBS 드라마에서 주된 소재로 사용되면서 유명세를 탔던 기억이 있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장미꽃을 유달리 좋아하는 두 어린 아이 - 게르다와 카이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이다. 평소처럼 장미꽃을 가지고 놀던 어느 날, 카이의 눈에 유리조각이 밖히는데 그 유리조각은 다름 아닌 악마가 모든 것을 추하게 보이도록 만든 거울이 깨지면서 생긴 파편이었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카이는 눈의 여왕의 마법에 걸려 그녀를 따라 나서고, 혼자 남은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온갖 역경을 딛고,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게르다는 결국 눈의 여왕이 사는 성에 도착하지만 눈과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린 카이는 게르다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게르다의 눈물이 얼어버린 카이의 눈과 마음을 녹이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참,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게르다와 카이는 다 자란 숙녀와 청년이 되어 있다. 언뜻 보면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동화일수도 있지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랑과 우정, 상처, 희생 등에 대한 풍부한 은유와 상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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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연인들>에 대한 리뷰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으로 시작한 이유는 단 하나. '라플란드' 때문이다!
게르다가 카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의 여왕이 살고 있는 '얼음성'이다. 그녀의 성은 다름 아닌 '라플란드'... <북극의 연인들>에서 오토와 아나가 다시 재회하게 되는 곳 역시 '라플란드'이다. 실제로 유럽의 최북단 지역이면서, 북극권이 시작되는 곳... 우연처럼 네 명의 이야기는 이 얼음과 백야의 땅을 향하고 있다. 사실 훌리오 메뎀의 <북극의 연인들>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은 그저 공간적 배경이 같을 뿐 큰 연결고리가 없을 수도 있다. 카이와 게르다는 오토와 아나의 이름처럼 회문(palindrome)의 이름도 아니고, 복잡하게 얽힌 가정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라플란드'가 은유하는 바도 그다지 비슷하게 형상화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북극의 연인'에게서 자꾸 카이와 게르다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토와 아나가 라플란드로 향하는 '길(누군가를 찾아 떠나는 길)'이 닮았기 때문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얻게 되는 때로는 격하고 때로는 소소한 감정과 경험들이 네 명이 걷게 되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물론 두 이야기의 결말은 너무도 다르지만...

이렇게 본다면 <북극의 연인들>은 사랑을 배우고, 이별을 경험하는 '멜로드라마'이자 '성장영화'의 틀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북극의 연인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처음은 오토와 아나가 처음 만나게 되는 어린 시절, 다음은 연인과 남매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하는 사춘기, 그리고 마지막은 어른이 된 이후의 그들이 이별과 재회를 하는 시기가 된다. 즉, 오토와 아나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면서, 그들이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과 겪는 경험들에 카메라를 집중하고 있다. '라플란드'는 그 여정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는 지점이 된다. 동시에 오토와 아나의 반복되고 순환되는 '우연'을 완성시켜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과연 라플란드에 이르는 길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까? 쉽게 풀어 말하자면 오토와 아나, 카이와 게르다의 경험은 특별하지만, 그 감정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한 번 쯤은 고민해봤을 사랑에 관한 문제들... 아니면 지금까지도 우리가 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숙제들... 오토와 아나가 보여주는 그 감정들은 바로 영원과 우연 그리고 영원과 유한의 문제들이다. 내 사랑이 운명인지, 그리고 영원할 것인지...

<운명과 우연>

<북극의 연인들>의 처음과 마지막은 같은 장면이다. 한 여인이 자동차에 부딪히고 지켜보던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관객이 여인의 죽음을 예상할 때, 여인은 계단을 뛰어 올라 그녀가 조금 전의 그 남자를 만난다. 어느 것이 실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여인이 그 남자를 보고 있다는 것은 어느 경우가 됐든 '진실'이 된다. 그리고 플래시백... 그 여인과 남자의 과거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관객은 끝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 듣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결말로 향하는 길을 숱한 '우연'들로 채우고 있다. 어린 오토는 축구공을 주우려 가다 어린 아나를 만나고, 아버지를 잃은 아나는 오토를 본 순간 그를 좋아하게 된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우연히 같은 차에 탄 오토의 아빠(알베로)와 아나의 엄마(올가)는 사랑을 하게 되고, 그들은 연인이 아닌 남매가 된다.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며 아나와 오토는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그들의 우연은 좀처럼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우연은 다른 우연들보다 슬프게 찾아왔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보는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우연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해진 결말(운명)을 이루는 우연들... 우연과 운명은 어쩌면 한 얼굴의 다른 표정일지도 모른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스페인의 한 마을, 오토의 할아버지와 독일 공군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오토와 아나의 만남은 우연일수도, 운명일수도 있다. <오토의 아버지가 독일인과 결혼을 하고 / 오토가 독일식의 이름을 갖게 된 것도 / 아나의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 오토의 부모가 이혼을 한 것도 / 혼자가 된 알베로와 올가가 비 오는 날 만난 것도 / 올가가 다른 알베로와 사랑에 빠진 것도 / 그 알베로의 아버지가 '오토'인 것>도 모두 예정에 없던 우연이다. 하지만 오토와 아나의 사랑은 이 모든 우연을 운명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기억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가능하게 한 과거의 어느 순간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의미 없이 흘려보냈을 다른 기억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나는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 할아버지가 있는 라플란드에서 오토를 기다린다. '추운 곳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토는 그녀를 향하기 위해 라플란드로 향한다. 그들의 우연이 완성될 듯 보인다.

하지만 옛날 오토처럼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그들의 만남은 어긋난다. 그들이 '만남'을 그토록 기다렸을 때, 그 순간은 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오토와 아나의 경우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에 우연한 만남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우리가 그들의 만남을 우연이면서도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유한과 영원>

알베로는 8살 난 아들 오토에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계절도 영원하지 않고 연인의 사랑도 변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를 떠난다. 하지만 오토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 엄마를 떠나는 아빠가 남긴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세상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 하지만 오토는 아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엄마를 떠난다. 그리고 엄마의 싸늘한 주검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오토는 엄마에 대한 사랑이 변했듯 아나에 대한 사랑 역시 언젠가는 변할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아나의 곁을 도망치듯 떠난다. 아나 역시 떠난 오토를 그리워하지만 곧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한다. 영원할 것 같은 그들의 열병같은 위험한 사랑도 아빠의 말처럼 '시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나의 사랑도 짧게 끝이 났고, 올가와 알베로의 사랑도 차갑게 식었다. 인간이 유한하듯  영원한 것은 없는 듯 보인다.


오토는 라플란드와 스페인을 오가며 우편 배달을 한다. 그리고 아나는 오토를 만나기 위해 라플란드로 떠난다. '라플란드' - 얼음과 백야의 땅이다. 낮과 밤이 바뀌지 않고 해가 떠있는 곳이자, 모든 것이 눈으로 뒤덮힌 변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만큼은 그들의 사랑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 오토와 아나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오토가 아나를 찾으러 가지만, 비행기가 추락하고 아나가 반대로 오토를 찾아 나선다. 살아남은 오토가 다시 아나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을 앞두고 그들의 비극은 시작됐다. 영화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결말이 실제인지 확신할 수 없다.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는 아나가 실제인지, 오토를 만나기 위해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아나가 실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처음에 말했듯이 분명한 것은 아나의 눈에 눈물이 차고, 그 안에 오토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아나의 삶과 죽음은 영원과 유한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되지도 않고 대비되지도 않는다.
영화는 아나와 오토의 시선이 반복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그리고 마지막 '아나의 눈에 비친 오토'라는 제목처럼 둘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 끝일 수도 있지만 이제서야 그들의 사랑은 시작일지 모른다.

<눈의 여왕>에서 게르다가 눈물로 카이의 마음을 녹였을 때, 얼음조각이 떨어져 나오면서 얼음글자가 완성된다. 눈의 여왕이 카이를 만나기 전에 게르다에게 던졌던 문제의 답은 '영원'이었다. 오토와 아나, 게르다와 카이처럼 '영원'이 모두가 얻고자 하는 바라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오토처럼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의 사랑에서 도망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수 있다면 만족해야겠지... 그것이 운명이든 우연이든, 영원하든 변하든...


<북극의 연인들>은 1998년 영화다. 훌리오 메뎀의 다른 영화들처럼 굉장히 이미지가 강하고 회화적인 영상이 영화 전체을 이루고 있다. 10년이 넘은 영화지만 전혀 옛날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여기에 감독의 독특한 스토리 구성이 돋보인다. 시간의 순서대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영화의 시작과 동일하게 구성하고, 그 안의 이야기를 오토와 아나의 시선으로 교차시키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그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재구성되는 것이다. <렛 미 인>과 더불어 이번 겨울을 허전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