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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France, Germany, Italy; 1974; 138min; 35mm; Color
Director: Louis Malle
Cast: Pierre Blaise, Aurore Clement, Holger Lewenadler

 
라콤 루시앙은 18살의  프랑스 남부의 작은 시골에 살고 있는 청년이다. 마을의 요양원에서 허드렛일하며 근근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아빠와 형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감옥에 들어갔고, 현재는 엄마와 함께 산다. 하지만 엄마의 새 남자친구 때문에 따로 나가 살아야 할 판이다. 18살이나 됐으니 혼자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알게 모르게 눈치를 주고 있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형처럼 레지스탕스가 되기로 한다. 눈치 안 보고 집에서 나갈 수도 있고, 왠지 멋있어 보인다. 엄마도 버릇처럼 형을 본받으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운동을 주도하는 학교 선생님을 찾아간다. 하지만 선생님은 루시앙의 부탁을 받아주지 않는다. 하긴 그게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다 우연히 독일 경찰들이 일을 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레지스탕스와 정반대의 길이다. 그런데 이 곳이 더 멋있다. 학교 선생님에 대해 몇 가지 알려줬더니 술도 주고, 밥도 주고, 총도 주고, 옷도 주고, 잘 곳도 준다. 궁색하게 사는 것보다 이게 훨씬 좋을 거 같다. 집에 돈도 보내줄 수 있으니 감옥에 간 형에게 뒤질 것도 없다. 레지스탕스 잡으러 다니는 경찰 놀이도 토끼 사냥하는 것보다 재미 있다. 자기를 무섭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어깨 펴고, 고개 들고 다닐 수도 있다. 마음이 있는 여자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누구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그래서 이 생활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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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도 잘 하고, 집안 일도 잘하는 순박한 시골 청년 라콤 루시앙은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됐다. 애초에 심각한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레지스탕스가 되든,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되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단지 부모를 벗어나 '살아갈 방법'이 필요했을 뿐이다. 만약 마을 선생님이 루시앙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그는 아마 형처럼 독일 경찰에 맞서는 멋진 레지스탕스가 됐을 것이다. 당장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풍족한 하루가 국가나 민족보다도 소중하다. 당연하다. 루시앙에게 찾아온 그 즉흥적인 순간, 그의 선택은 당연했다. 그저 배가 부르고, 잘 곳이 있었고, 폼이 났을 뿐... 당시의 상황을 보면 루시앙의 선택이 얼마나 '즉흥적'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영화의 배경은 1944년 봄을 맞은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괴뢰정부를 세우고 5년이 지난 후였다. 1944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동맹국에 대한 연합국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독일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봄이 지나고 6월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8월 파리 해방으로 프랑스는 다시 온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루시앙이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그 봄날 스스로를 사지로 몰고갈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되고, 그 달콤함에 중독될 때까지 그는 '의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단지'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최신식 양복을 빼 입고, 총을 차고, 사람들을 압도하는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루시앙에게 '의지'가 생긴 것은 알베르와 그의 딸 '프랑스'를 만난 이후부터이다. 숨어지내는 유태인 알베르 가족을 만나면서 그는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다. 루시앙은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그들을 천천히 '가족'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아주 서툰 방법으로... 하지만 알베르와 프랑스는 그런 루시앙이 편하지 않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만, 언제라도 자신들에게 총을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아다. 생존을 위해 적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알베르의 가족에게 루시앙은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라도 그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힘이 필요했다. 그가 힘을 가져야 할 '이유'와 '의지'가 생긴 것이다. 이 때부터 동료가 살해되고, 레지스탕스의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안한 생활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알베르가 독일군에게 끌려갔을 때 그는 프랑스인으로 독일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이 프랑스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떠난다. 아주 서툰 방법으로...

루시앙의 잠시 동안 화려한 생활도 봄과 함께 지나갔다.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전시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군이 수세로 몰리면서 그들은 퇴각을 준비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유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진다.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독일군에게 미래의 적이기 때문이다. 알베로가 떠나고 남은 프랑스와 벨라도 예외는 아니다. 루시앙은 독일군 병사와 함께 그녀들을 데리러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루시앙은 다시 한 번 그녀들을 지키기 위한 위험한 선택을 한다. 프랑스, 벨라와 함께 산 속으로 몸을 피한 루시앙은 잠깐 동안이지만 그들과 평화로운 생활을 즐긴다. 프랑스와 사랑을 나누고, 그녀를 위해 토끼를 잡고, 집이 따뜻하도록 불을 지핀다. 하지만 불안한 평화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올지 모른다. 옆에 있는 프랑스로부터 올 수도 있고, 레지스탕스로부터 올 수도 있다. 아니면 퇴각하고 있는 독일군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우리는 루시앙의 비극적 결말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루시앙은 너무도 한가롭게 풀밭에 누워 있다. 그가 체포되고 처형이 됐다는 자막이 올라간다. 루시앙의 인생의 비극적 결말과 관계 없이 우리가 보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시대에 휘말리기 전에 누렸던 '일상의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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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인물이 정확하지 않지만 "당신은 그보다 프랑스인답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런 사진에 루시앙은 총을 겨누고 있다. '개인'으로서 루시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 영화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출발한다. 루이 말은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한 개인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그의 인생이 실화인지 아닌지 정확히 확인은 되지 않지만 라콤 루시앙의 삶은 분명 당시의 분위기로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적 인물로 표현된 라콤 루시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감독은 그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루이 말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줄기차게 보편적으로 믿어지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 거침 없는 메스를 들이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파격', '도발'과 같은 수식어를 동반했다. 우리가 1974년 작 <라콤 루시앙>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국가(혹은 민족)와 개인의 관계 관한 것일 수 있다. 프랑스는 전후처리를 가장 깔끔하게 했던 나라 중에 하나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친일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마다 모범 사례로 꼽는 것이 프랑스이다. 그 만큼 프랑스는 괴뢰정부 5년 동안 독일 나치를 위해 복무한 이들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했다. 그렇다면 그 처벌의 기준은 무엇일까? 단연코 그것은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논리에 가깝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영화의 마지막 라콤 루시앙이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의 근거도 역시 라콤이 개인의 안위를 위해 '반국가적',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국가'와 '민족'과 같은 거시적인 잣대가 개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물어본다면 분명 문제는 달라진다. 질문의 답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전체가 될 수 없다. 정치적 계산을 모르던 라콤에게는 더더욱이나 그렇다. 탈출에 성공한 뒤 라콤과 프랑스가 누리는 일상적인 행복처럼 라콤이 꿈꾸던 바도 그런 평범한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운한 시대'는 라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분명 라콤 루시앙은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고 정치적 의식도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우연하지 않은 순간에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됐다. 라콤의 비극적 결말을 보자면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즉흥적으로 라콤에게 찾아온 1944년 봄의 어느 날은 분명 그에게 너무 달콤한 기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18살의 뜨거운 첫사랑을 하게 됐다. 그 생활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던 여인이다. 그녀는 또 그의 선택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경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옳을까? 라콤의 인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막'처럼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것일까? 분명 시대가 개인을 속박하는 것은 비극이다. 시대 안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의 수는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라콤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대'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자기 앞에 놓인 시대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대와 함께 자신의 '선택' 역시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들이다. 모든 걸 시대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루이 말은 분명 불운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순박한 청년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화롭게 살았을 한 청년... 그렇다고 루시앙을 동정하거나 감싸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정말이지 시종일관 도저히 감정이 읽히지 않는 루시앙의 표정은 그에 대한 감정이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감독은 이런 라콤 루시앙의 캐릭터를 통해 상당히 공고한 이분법적인 국가와 개인의 틀에 대한 파괴를 시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이 아니면 반역자가 되는 경계에 대한 파괴 말이다.

난 기본적으로 우리 역시 친일의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 이유는 앞에서 밝힌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힘든 상황을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다수의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 차원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영웅과 반영웅의 굉장히 이분법적인 틀에 갖혀서 문제를 봤던 것 같다. 오히려 이런 답답한 관점이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더욱 요원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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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큐브에서 열리고 있는 루이 말 특별전의 두 번째 상영작 <라콤 루시앙 Lacombe Lucien, 1974>을 보고 왔다. <마음의 속삭임>이 1971년에 만들어졌으니, 꼭 3년이 걸려 루이 말이 선보인 그의 9번째 영화다. 비슷하게 성장영화로 읽히지만 루시앙은 <마음의 속삭임>의 로랑과 상당히 다른 캐릭터를 구현한다. 시대적 배경이 다를 뿐 아니라 가정 환경 역시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루시앙과 로랑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라콤 루시앙>의 매력적인 또 하나의 캐릭터는 루시앙이 사랑하는 여인 프랑스다.(이름이 '프랑스'인 것이 아이러니하다.) 31살의 오로르 클레망(unbelievable!!!)이 연기하는 프랑스는 자신을 살려준 루시앙과 살고 있지만 그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적과 동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극적으로 보여준다. 툭히 영화의 마지막 독일군을 피해 달아난 산 속에서 루시앙에게 기대면서도 그에게 '돌'을 내리치려는 장면은 프랑스의 이중적인 고민을 임팩트있게 보여주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