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에서 방영한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을 감상했다. 쿠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여지껏 한 번도 보지 못해서 과연 그의 명성에 비해 작품이 어떨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전국 시대 풍의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소한 느낌을 받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차례의 지루함도 없이 흥미진진한 느낌이 들었다. 권력의 욕구를 위해 싸우는 인물들의 모습과 그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겪게 되는 사람들, 그리고 마치 신의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충격적인 마지막 결말까지 드라마적인 구성이 탄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란'의 초반부는 이치몬지 히데토라라는 성주가 멧돼지 사냥을 마친 후 잠시 천막에서 휴식을 취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 서로의 공을 치하하고 술을 나누는 모습은 화기애애하지만 각 인물들이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은 어딘가 모를 위화감과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치몬지 성주와 동맹 관계에 있는 아야베와 후지마키 영주는 이치몬지의 셋째 아들인 사부로와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켜 달라고 요구를 하게 되고 세 아들 중 막내 아들인 사부로는 이런 두 영주를 토끼에 비유함으로써 갈등을 조성하고 있다. 이 때 노쇠한 이치몬지는 갑자기 잠이 들게 되어 잠시나마 갈등이 해소된다. 하지만 사부로의 직설적인 발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두 형과 그들을 보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부로의 모습은 형제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음이 드러난다. 악몽을 꾼 이치몬지는 놀란 듯이 천막 밖을 튀어나와 자신이 황량한 들판에 홀로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이후 아들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꿈에서 깨어났다고 고백한 이치몬지는 세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아버지의 부정에 감동하는 두 아들과 달리 사부로는 노쇠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놀라한다.
꿈에서 깨어난 이치몬지는 모든 사람을 불러 모은 뒤 자신의 권력을 장남인 타로에게 이양할 것을 선언한다. 이제 자신은 세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고 싶다고 고백한 이치몬지는 화살을 가져온 뒤 형제의 우애를 지킬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사부로는 억지로 화살 뭉치를 분질러 형제 간에 우애를 지키라는 아버지의 정감있는 행동에 반감을 드러낸다. 사부로의 형인 타로와 지로는 직설적인 사부로의 행동에 화를 내지만 사부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아버지의 행동을 비난한다. 이치몬지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타로와 지로와 달리 사부로는 건방지고 직설적인 행동을 취하지만 사부로는 직설적인 발언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볼 것을 요구한다. 그는 난세에서 평생 인정과 용서 없이 상대방을 살해하여 성주의 자리에 오른 이치몬지가 노년에 난세의 자식들에게 의지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부로의 직설적인 말과 행동을 오만하다고 여긴 이치몬지는 사부로를 파문시킨 후 그를 자신의 영지에서 추방시킨다. 사부로와 그의 충신인 탄고는 자신들의 충고를 묵살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탄식한 후 조만간 불어올 피바람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 때 사부로의 행동을 지켜본 후지마키가 나타나 그를 사위로 삼고 싶다고 고백한다. 사부로는 자신의 행동의 진심을 이해한 후지마키와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영지를 떠난다.
형제들을 경계할 것을 충고한 사부로의 예언은 현실화 된다. 권력을 승계한 장남 타로는 이전의 공손한 태도를 벗어 던지고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외딴 성에 보낸 후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타로는 그의 아내인 카에데와 함께 아버지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권력을 이양하기 전만 해도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이치몬지는 이제 자신의 광대인 쿄아미에게 허수아비라는 비아냥까지 받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심지어 이치몬지는 타로의 하수인을 활로 죽였다는 이유로 아들이 보는 앞에서 서약을 맺게 된다. 주인의 자리에 앉은 타로가 자신의 부하를 다루듯이 아버지에게 서명을 요구하는 모습을 통해 부자의 정은 난세에서 헛된 것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편 카에데의 대사를 통해 타로와 카에데 부부가 단순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부부가 아닌 서로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동업자 관계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치몬지 성주에게 자신의 가족이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인 타로와 결혼한 카에데는 이치몬지의 몰락을 통해 자신의 복수를 달성한 것이다. 카에데의 침착한 목소리와 절도있는 행동 속에 숨겨진 그녀의 욕망과 야심은 권력을 승계한 타로보다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타로에게 모욕을 겪은 이치몬지는 그의 배은망덕한 행동에 분노한 나머지 자신의 수행원을 데리고 둘째인 지로가 지키는 성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타로 못지 않게 야심을 숨겨왔던 지로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타로의 권력을 빼앗을 궁리를 하고 그 결과 자신에게 아버지가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판단한다. 이치몬지는 지로의 야심은 생각치 못한 체 자식의 정에 기대어 지로의 성에 찾아가지만 지로는 이치몬지의 수행원들을 성 안에 들여 보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를 무력화하려고 한다. 지로의 진심을 깨달은 이치몬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체 성을 빠져 나온다. 이제 그가 유일하게 기댈 사람은 3남인 사부로이지만 그의 충고를 듣지 않은 이치몬지로서는 그를 찾아갈 염두도 내지 못한 체 벌판에서 굶주린 체 주저 앉는다. 이 때 사부로의 충신인 탄고가 나타나 자신과 함께 사부로를 찾아갈 것을 충고하지만 이치몬지의 신하들은 사부로가 후지마키에게 의지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를 경계할 것을 요구한 뒤 오히려 사부로가 있던 성을 점령하자고 설득한다. 광대인 쿄아미는 '지옥은 가까이 있는데 극락은 아득하구나'라는 싯구를 통해 이치몬지를 설득하려 하지만 사부로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던 이치몬지는 말을 이끌고 사부로의 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후 등장하는 찌푸린 하늘은 이치몬지의 행동이 지옥을 향해 나아간 것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치몬지는 사부로의 성을 점령했지만 쿄아미의 싯구처럼 그 곳은 지옥으로 변해 버린다. 권력을 탐하던 두 아들 타로와 지로는 성을 향해 군대를 투입해 이치몬지를 죽이려 한다. 영화는 스펙터클한 광경을 통해 처참한 전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암흑으로 뒤바뀐 하늘의 모습과 적군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군인들의 모습, 계단을 향해 올라오는 군인들을 향해 애타게 칼을 휘두르는 이치몬지의 모습은 슬픈 가락으로 울려 퍼지는 음악과 어우러져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자신의 아들들과 신하들에게 배신당한 이치몬지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할복할 칼을 찾지만 그에게 명예를 지킬 순간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비참한 전쟁을 통해 이치몬지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 걸인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정신을 놓아 버린체 쓸쓸히 성을 빠져나가는 이치몬지의 모습을 본 군인들은 차마 그를 향해 칼을 휘두르지 못한 체 그를 바라만 본다. 성을 빠져 나온 이치몬지는 이제 평범한 백성처럼 풀을 뜯는 행동을 취하는 광인이 되어 버린다. '미친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미쳐야 하는 법'이라 말하는 쿄아미의 말이 그의 신세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버지의 성을 점령한 후 성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던 타로는 뒤에서 날라온 총에 맞아 숨지고 만다. 형의 권력을 승계하게 된 지로는 형수인 카에데를 불러 형의 전사를 알린다. 사태를 직감한 카에데는 공손히 걸어와 타로의 투구를 지로에게 바치려 한다. 군주와 신하의 예를 차리던 카에데는 지로가 투구를 받는 사이 단도를 들이대 그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다. 아래에서 지로를 내려다 보던 카에데는 이제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면서 지로를 압도한다. 지로에게서 진상을 들은 카에데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방의 문을 하나씩 닫으면서 다가오는 장면은 열린 공간을 폐쇄시키면서 공포감을 조성한다. 지로를 내려다 본 카에데는 그녀의 야심을 드러낸다. 타로의 죽음을 침묵하는 대신 자신을 지로의 정실 부인으로 삼게 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보전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지로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카에데와 관계를 맺은 후 그녀를 총애하게 된다. 카에데는 이제 지로를 통해 이치몬지 가문의 몰락이라는 자신의 원을 계속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카에데의 모습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작품인 '맥베스'의 맥베스 부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지로에게 몸을 의탁하는 수동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정실 부인인 스에의 목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지로와 그의 부하들의 사이를 갈라 놓는 카에데의 모습은 몽유병으로 심적인 갈등을 드러내는 맥베스 부인보다 강렬하고 적극적이며 나쁜 의미로 악독한 느낌이 든다. 스에의 목을 가져다 달라는 카에데에게 여우 석상의 목을 잘라 바치는 지로의 부하의 모습은 지로의 세력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을 여실히 드러낸다.
광인이 된 이치몬지는 쿄아미, 탄고의 도움을 받아 폐허가 된 성 근처에 있는 누추한 백성의 판잣집에 머물게 된다. 불도 켜지 않은 체 있는 남자를 향해 불을 비춘 일행은 그 사람이 스에의 남동생인 츠루마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치몬지가 성을 점령하면서 가족이 살해당하고 눈이 멀게 된 츠루마루는 자신이 당한 끔찍한 비극을 부처님의 자비를 통해 극복하려 했지만 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 뒤 누추한 대접이라는 명목으로 피리를 불기 시작한다. 자신이 살해했던 가족의 자식을 만나게 된 이치몬지는 피리 소리를 듣는 순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그 곳을 빠져 나오게 된다. 이치몬지는 자신이 잿더미로 만든 성벽의 자취를 걸어가며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반문하기 시작한다. 완전히 미친 것처럼 스스로 묻고 행동하는 이치몬지 옆에서 그를 수행하던 쿄아미는 노골적으로 노인에게 희롱과 분노를 터트리지만 끝내 그를 버리진 못한다. 쿄아미가 그를 버리지 못한 건 세상에게 배신당한 이치몬지에게 조금이나마 연민과 동정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 이치몬지가 광인으로 떠돌면서 피해자의 가족을 만나고 자신이 짓밟은 성을 목격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여태껏 노인의 목숨을 부지하도록 만든 것은 그의 야심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원혼을 느끼도록 한 신의 장난처럼 느껴지면서도 이치몬지의 과욕이 만들어낸 운명의 비극으로 인해 스스로 고통받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결국 이치몬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바로 지옥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지옥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던 것이다.
사부로는 아버지를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지로의 영지에 나타난다. 한편 지로는 사부로의 움직임을 예사롭지 않게 느끼면서 방어에 전념할 것을 요청한 부하들의 조언을 묵살한 체 군대를 이끌고 마주하게 된다. 형제들의 다툼에서 실리를 얻기 위해 나타난 아야베와 사위인 사부로를 도와주기 위해 등장한 후지마키까지 개입하면서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사부로는 자신의 군대를 배치해놓은 뒤 말을 타고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결국 이치몬지를 둘러싼 형제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세력은 아무도 없게 된다. 지로와 카에데는 자신들이 벌어들인 화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며 선의 대표적인 인물인 사부로가 아버지와 재회하면서 모든 비극이 정리될 것 같았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사부로의 죽음을 통해 비극을 극대화한다. 이치몬지는 아들의 죽음에 경악해 하며 슬퍼하다가 마치 그 광경을 목격하기 위해 여태껏 살아간 것처럼 생애를 허무하게 마무리 짓는다. 슬픔과 분노로 가득찬 쿄아미가 비극을 신의 탓을 돌리자 탄고는 그를 꾸짖으며 인간사의 비극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닌 인간의 욕망이 초래한 비극임을 드러낸다.
'신과 부처님을 욕하지 마라. 울고 있는 건 그들이다. 어떤 세상이든 서로 죽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반복되는 악행은 신도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이것이 인간의 세상이다. 인간은 행복보다 슬픔을, 평안보다 번뇌를 추구하는 것이다. 보아라, 지금 인간들이 슬픔과 번뇌를 찾아 서로 죽이며 희열을 느끼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인간들의 욕망으로 빚어낸 비극과 슬픔 그리고 허무를 홀로 남겨진 츠루마루를 통해 쓸쓸하게 전달한다. 홀로 남겨진 체 성벽 위에서 어찌할 줄 모른 체 서있는 츠루마루의 모습을 담은 익스트림 롱쇼트와 츠루마루가 떨어뜨린 부처님의 초상화는 인간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살육의 비극을 지켜보면서도 눈물을 흘린 체 그들을 바라봐야 하는 신의 슬픔을 대변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