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1974년 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27일 토요일 아트 하우스 모모에서 세 번째 블로거 영화제가 열렸다. 첫 회 '과연 이게 될 것인가' / '관객들이 찾아 올 것인가' / '평론가와 감독 없는 씨네토크가 가능할 것인가' / '상영 후 남아서 관객들이 손 들고 자기 생각을 얘기 할 것인가' 여러 고민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그런 걱정들을 껴안고 석 달이 지나 세 번째 상영을 마치고 나니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 일은 다른 블로거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이런 뜻깊은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하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말이다.
이 번 상영작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1974년도 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감독도 유명하지만 영화보다 제목이 더 유명한 작품이다. 지난 달에 아깝게 <쥴 앤 짐>에 밀려 2등을 했었는데, 이번 달에는 반대로 아슬아슬하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이기고 1등이 됐다.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도 있고 해서 분위기 좋은 사랑영화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왠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우울한 분위기가 걸림돌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씨네아트 블로그의 독자들의 1등으로 꼽은 영화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더풀 라이프>도 그랬고 <쥴 앤 짐>도 그랬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고, 또 적지 않은 분들이 시네토크에 함께 하셨다.
극장의 다음 상영 스케쥴 때문에 30분 정도의 시네토크를 마쳤다. 열 분 정도의 관객분들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던져주셨다. 기억에 남는 얘기는 '엔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결말에 어떤 분들은 희망을 봤고, 또 다른 분들은 아픔을 느꼈다. 위궤양에 걸린 알리과 그의 옆을 지키는 에미의 모습은 분명 갈등을 겪고 난 연인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회복의 이미지였지만, 반대로 그들의 아픔이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슬픈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귀가 따갑도록 듣고 하는 말이지만 정답은 없다. 개인적으로 느낄 뿐이니까...
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의미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한 분도 있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알리 같은 차별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동료들과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 그렇게 하면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불안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 그 무리를 뛰어 나가면 반대로 행복은 얻을 수 있지만 불안은 커지게 된다. 알리가 무리를 뛰쳐나가 에미를 선택했을 때, 알리는 행복을 얻었지만 그 만큼의 불안 역시 갖게 된 것이다. 그 불안이 결국 알리 스스로를 잠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객의 말을 듣고 보니 "너무 행복해서 불안하다."는 극중에서 에미의 말이 뒤늦게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았다.
소외 당한 사람들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감상도 있었고, 다른 외국인을 차별하는 에미와 다른 여자를 찾는 알리의 이중적 태도에서 그들의 한계를 지적한 분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이가 어린 관객과 비교적 중년의 여성 관객이 다른 영화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한 점이다. 젊은 여성분은 에미의 행동이나 말투에서 그리고 에미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돌아온 알리를 다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단지 '애정'이 아닌 '모성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 반면에, 중년의 여성분은 국적, 피부색, 나이와 상관 없이 알리와 에미에게서 진정한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이에 따라서 영화가 주는 느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마이크를 잡고 잠시 멍해 있었다. ^^
재미있는 얘기들과 반응도 많이 나왔다. 한 분은 알리가 극 중에서 먹고 싶어 하는 쿠스쿠스는 한국 사람에게 치면 김치와 마찬가지인데 그걸 못 먹게 했으니 알리가 화가 날 만하다고 해서 큰 웃음 주셨다. 또 극 중에서 알리가 동성애자인 파스빈더의 실제 남친이라는 사실과 에미의 사위로 나오는 사람이 실제 파스빈더였다는 사실에 관객분들은 꽤나 놀라시는 눈치였다. 이 밖에도 영화가 1974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영화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물음을 던져주는 영화라는 소감도 있었다. 정말이지 회가 거듭될수록 영화에 대한 관객분들의 시선의 깊이와 넓이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앞으로도 블로거 상영회가 계속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기대가 생기는 것 같다.
이렇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로 2008년의 블로거 상영회는 막을 내렸다. 2009년 1월 상영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는데 조만간 포맷이 정해질 것 같다. 한 살 더 먹는 만큼 뭔가 더 좋아져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