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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체인질링] 보수적 가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장의 혜안


체인질링 (Changeling)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2008

안정된 연출, 훌륭한 연기, 완벽한 이야기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흥분과 설렘을 느끼게 하는 영화가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도 그 중 하나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이미 연출력을 인정받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미스틱 리버>로부터 시작해 <밀리언 달러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까지 이어진 걸작들의 향연은 그를 장인의 자리에 올려놓기 충분했다. 70대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매번 완성도 고른 영화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신작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2년만의 신작 <체인질링>으로 변함없는 노련함을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다.


<체인질링>은 실종된 아들을 찾겠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부패한 권력과 맞서게 된 한 어머니의 모성애 넘치는 고군분투기다. 주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가부장중심, 남성중심의 시각을 드러냈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여성, 정확히는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가치들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인질링>은 변함없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다. <체인질링>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단순히 가부장중심, 남성중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각 스릴러와 복싱영화의 외피를 빌려 부성애에 대해 이야기했던 <미스틱 리버>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결국에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체인질링>에서도 이야기의 원동력은 가족이다. 전화국에서 일하며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싱글맘에 불과했던 주인공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가 거대한 부패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모성애 때문이다. 모성애는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만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말하던 부성애와 <체인질링>의 모성애는 그 주체가 달라졌을 뿐 가족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나 다름없다.

알려진 대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보수주의자이다. 그가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그가 꾸준히 영화를 통해 가족주의, 기독교주의와 같은 보수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의 보수주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수주의와는 다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적 가치관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것이지 사회 권력이나 체제의 유지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차이가 보수적 가치를 드러내는 그의 영화에 보편적인 울림을 담는다. <체인질링>에서도 크리스틴의 행복은 부패한 경찰로 인해 방해 받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아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크리스틴은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크리스틴의 싸움을 통해 <체인질링>은 보수적 가치관에서 최대한으로 가능한 사회 비판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주의는 사회에 유익한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건강한 보수주의다. 크리스틴의 이야기에 LA시민들까지도 하나가 돼 부패한 경찰에 대항하는 모습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연상케 한다. 건강한 보수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영화와 같은 광경은 이뤄질 수 없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부패한 권력의 정체가 드러나는 청문회 신이다. 거대한 권력을 향한 도전의 대가로 점점 나락에 빠져드는 크리스틴을 통해 보는 이의 진을 빼놓은 영화는 그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부패한 경찰에 대한 처벌을 통해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보는 이의 감정을 뒤흔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재능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작들에 비해 감정의 변화가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체인질링>은 그의 전작들에 버금가는 걸작보다는 조금은 아쉬운 범작처럼 보인다. 작은 이야기를 통해 마음속에 잔잔한 파고를 일으켰던 전작들이 워낙 훌륭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체인질링>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안정적인 연출,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여기에 완벽한 이야기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적 만족감으로 충만한 작품이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