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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레저베이션 로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용서와 복수


레저베이션 로드 (Reservation Road)
테리 조지 감독, 2007년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이끌어가는 심리드라마

모든 것은 길 위에서 시작됐다.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그러나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사고였다. 하지만 갑작스런 사고는 어느 새 사람들의 삶을 파고들며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아이를 잃어버린 아버지는 점점 가해자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을 키워나가고, 아이를 잃을까봐 사고 사실을 숨긴 또 다른 아버지는 죄책감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감정의 나락에 빠져든다.

우연히 일어난 뺑소니 사고를 소재로 한 <레저베이션 로드>는 하나의 사고로 인해 변해가는 인물들의 감정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심리드라마다. 영화는 피해자는 선이고 가해자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관습을 배제하고, 대신 양측이 짊어져야만 하는 감정의 무게들에 초점을 두며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인물들의 감정이 중요한 영화인만큼 도드라지는 것은 당연히 배우들의 연기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에단 역의 호아킨 피닉스는 우수에 찬 표정에서 점점 분노로 판단력을 상실해가는 아버지를 훌륭하게 소화해냈고, 아들을 걱정해 사고 사실을 숨긴 드와이트 역의 마크 러팔로 역시 죄책감 속에서 선뜻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속살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제니퍼 코넬리와 엘르 패닝 등 조연들의 연기까지 빼놓을 게 없는 <레저베이션 로드>는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앙상블만으로도 제값을 충분히 하고 있다. 물론 <호텔 르완다>를 통해 이미 뛰어난 감정 연출 솜씨를 선보였던 테리 조지 감독의 재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감정의 극한으로 치달아가는 에단과 드와이트의 모습을 통해 긴장을 더한다. <레저베이션 로드>는 두 사람의 심리 변화를 통해 인간 본연의 감정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던진다. 뺑소니 사고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과 채팅을 하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감정 변화를 겪게 되는 에단의 모습은 미움과 용서의 문제를, 의도하지 않게 자꾸 진실을 감추게 되는 드와이트는 죄의식과 책임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상반되는 심리 변화를 경험하는 두 사람이지만, 이 모든 변화가 알고 보면 부성애의 발로라는 점이 영화에 애절한 분위기를 더한다. 같은 출발점에서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두 사람의 심리 상태는 용서와 복수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정작 두 사람의 감정이 충돌하는 순간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둘을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한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에단과 드와이트는 마침내 극한 감정 속에서 자신들의 증오와 죄책감을 동시에 드러내지만, 화해와 용서의 제스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감정이 결국 같은 지점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영화의 긴장감이 맥없이 사라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래서이다. 실화를 소재로 한 <호텔 르완다>만큼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인물들의 감정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테리 조지 감독의 여전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만으로도 <레저베이션 로드>는 마음속에 적지 않은 파장을 안겨준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