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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home

번! (Queimada, 1969)

대항해시대 이후 스페인이나 포루투갈 같은 유럽의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미지의 땅을 찾아 다녔다. 평화롭게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은 총과 대포를 가진 유럽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그들이 살던 터전들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세월이 흘러 영국, 네덜란드 등 신흥 강국이 포루투갈과 스페인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를 빼앗았지만 원주민들에게는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동인도회사 같은 무역회사를 설립한 뒤 공정 무역이라는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해 식민지의 경제를 지배했다.

'번'은 퀘이마다라는 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식민지를 교묘하게 지배하고 수탈하던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인 퀘이마다는 한 때 포루투갈에게 지배당한 식민지이다. '불태워졌다'라는 의미를 가진 퀘이마다라는 단어가 섬 이름이 된 유래를 듣는 순간, 포루투갈의 식민지배가 얼마나 잔혹하고 악랄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영화는 퀘이마다 섬에 도착한 윌리엄 워커라는 영국인을 등장시킨다. 거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쳐보이는 백인인 윌리엄은 자신이 이 곳을 찾아온 목적을 숨긴 체 산체스라는 남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산체스는 윌리엄의 계획을 실행할 인물인 산티아고가 붙잡혔다고 말하면서 그의 계획이 실패했다고 알린다.

윌리엄 워커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킬 산티아고가 처형당하게 되자 계획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우연히 자신의 가방을 들어준 남자인 호세 돌로레스의 반항적인 눈빛을 목격하자 윌리엄은 그를 자신의 계획의 실행자로 삼기로 결심한다. 윌리엄은 호세를 각성시키기 위해 그를 도둑으로 몰아 모욕한다. 자신을 모욕하는 백인들의 부당함에 반항하지 못한 체 순진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던 호세는 결국 폭발하면서 윌리엄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호세에게서 저항적인 정신을 발견한 윌리엄은 그를 혁명투사로 성장토록 유도한다. 흥미로운 것은 윌리엄이 호세를 혁명투사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방식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인 '석양의 갱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존이 후안의 은행털이를 유도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내고 정부군과 싸움으로써 혁명투사가 되어가는 것처럼, 윌리엄은 호세에게 은행을 터는 계획을 실행하도록 유도하고 그를 쫓아오는 포루투갈 군인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총을 쏘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그를 혁명투사로 성장시킨다. 한때 외국인들의 짐을 들어주던 짐꾼이었던 호세 돌로레스는 제국주의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혁명군의 지도자가 된다.

하지만 윌리엄 워커는 '석양의 갱들'의 존과 달리 음흉한 의도를 가진 남자이다. 영화는 윌리엄이 백인들과 회의를 하는 모습을 통해 그가 순수한 목적으로 퀘이마다에 온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윌리엄은 포루투갈의 식민지인 퀘이마다를 마치 결혼제도에 묶여 있는 여인으로 비유한다. 즉 포루투갈의 독점적인 수혜지역인 퀘이마다를 해방시켜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포루투갈이 갖고 있던 독점 권리를 나눠 갖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윌리엄은 퀘이마다가 포루투갈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할 뿐 호세같은 흑인이 주체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엔 반대하는 셈이다. 이같은 검은 속내를 모르고 있던 호세 돌로레스는 수도에 도착하자 백인들의 기민한 행동에 당황해 한다. 이미 백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남자인 산체스를 대통령으로 삼고 군사를 가진 호세에게서 사탕수수 계약에 대해 압박해 오기 시작한다. 호세는 백인들의 이익을 우선시한 사탕수수 계약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명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인재와 인프라를 가진 원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백인들의 불공정한 계약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호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대를 해산시키고 모든 권한을 산체스에게 양도한다. 가까스로 호세와 백인들 간의 갈등이 회복된 뒤 윌리엄은 퀘이마다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인도차이나로 떠난다. 그를 환송하기 위해 찾아온 호세는 윌리엄과 위스키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우정을 확인한다. 호세와 윌리엄이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장래를 기원하는 모습은 마치 공정무역의 긍정적인 모습을 상징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후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영국이 주장하는 공정무역이 사실은 그들을 위한 일방적인 착취였음을 드러낸다.

10년 후 윌리엄은 다시 퀘이마다 섬에 도착한다. 이제 그는 영국 정부가 아닌 안틸레스 설탕 회사라는 무역 회사의 군사고문 자격으로 오게 된다. 영화는 10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통해 영국이 주장한 공정무역의 실체를 드러낸다. 안틸레스 설탕회사는 포루투갈로부터 독립한 퀘이마다 공화국으로부터 99년에 달하는 사탕수수 채취권을 얻어낸 후 영국 정부의 해군의 도움을 받아 퀘이마다의 경제와 사회를 지배한다.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영국은 포루투갈과 마찬가지로 퀘이마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결국 가난과 수탈을 견디지 못한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지도자인 호세 돌로레스의 지휘 하에 칼을 쥐고 그들의 지배자인 정부를 향해 봉기하게 된다. 윌리엄은 한 때 위스키로 우정을 나눈 사이였던 호세를 잡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ps.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원래 호세 돌로레스 역은 시드니 포이티어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감독이 연기경험이 없는 에바리스토 마르케즈를 영화에 출연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에바리스토 마르케즈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