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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산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데이빗 핀쳐 감독, 2008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이빗 핀쳐 감독

“인간이 80살로 태어나 18살을 향해 늙어간다면 인생은 무한히 행복하리라.”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남긴 명언이다.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 명언에서 영감을 얻어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거꾸로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을 1920년대에 발표했다. 그리고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에서 모티브를 얻은 한편의 영화가 우리 곁을 찾아왔다. 바로 데이빗 핀쳐 감독의 신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다.


데이빗 핀쳐 감독의 전작들에 관심을 가져온 이들에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의외의 작품이 될 것이 분명하다. 뮤직비디오 연출을 거쳐 <에이리언 3>로 데뷔한 데이빗 핀쳐 감독은 절망과 암울함이 가득한 스릴러 <세븐>으로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뒤, <더 게임> <파이트 클럽> <패닉 룸> <조디악> 등 주로 스릴러장르에 기댄 작품들을 줄곧 발표해왔다. 그러나 이번 신작에서 데이빗 핀쳐 감독은 처음으로 스릴러가 아닌 정통 드라마에 도전했다. 또한 자신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현란한 촬영 기교도 최대한 배제한 채 인물들의 감정에 충실한 연출을 선보이고 있다.

총 러닝타임 166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지금까지 발표한 데이빗 핀쳐 감독의 영화들 중 가장 긴 동시에 가장 느린 영화다. 전작 <조디악>보다도 무려 10분이나 늘어난 러닝타임을 자랑하지만, <조디악>처럼 영화 내내 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과 스릴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토록 길고 느린 호흡으로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거꾸로 나이를 먹어가는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80여 년에 달하는 삶을 담아내고 있다. 특별한 사건보다는 인생 자체에 초점을 둔, 벤자민 버튼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는 영화다.

영화 내내 거꾸로 나이를 먹어가는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화제가 됐지만, 정작 영화 속에 담긴 벤자민 버튼의 삶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다른 이들과 달리 거꾸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은 특별할지언정, 삶 자체는 다른 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외로움과 그리움, 인생과 운명에 대해 배우고, 낯선 곳에서 만난 첫사랑의 여인과 짧지만 행복한 순간을 보내며 세상을 좀 더 알게 되고, 한 사람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불태우기도 하며, 평생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벤자민 버튼의 삶은 알고 보면 무척 평범한 삶이다. 영화 초반, 늙은 모습으로 태어난 벤자민 버튼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낯섦이 영화를 보는 동안 점점 사라져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영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늙음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늙어간다는 것도 알고 보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생에 대한 성찰을 던지고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것들을 쉽게 포기한다. ‘그땐 그랬지’라며 젊은 시절을 추억하면서도 그때처럼 꿈과 열정을 안고 살아가려 하지는 않는다. 대신 늘어만 가는 것은 사는 것이 어렵다는 핑계뿐이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은 말한다. “꿈이 있다면 나이가 얼마든 이르거나 늦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크 트웨인이 이야기한 80살로 태어나 18살을 향해 늙어간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언젠가는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너겠다는 벤자민 버튼의 첫사랑은 일흔을 앞둔 나이에 끝내 그 꿈을 이루고, 살면서 7번이나 번개를 맞았다는 노인은 번개를 맞는 순간에도 삶에 대한 의지만큼은 잃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40대에 접어든 벤자민 버튼과 그의 연인 데이지(케이트 블란쳇)가 마침내 사랑을 불태우는 모습에서는 인생의 정점 역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벤자민 버튼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삶은 어느 순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맞닿게 된다. 영화가 가슴이 벅찰 정도로 깊은 감동과 여운을 선사하는 순간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 영화를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특별한 사건 없이 진행되는 만큼 매 순간 흥미를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에 선뜻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을 조망하고 있는 만큼 관객도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기 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 놓이기 때문이다. 벤자민 버튼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자서전이 그렇듯 여러 번 곱씹어 볼 것을 요구하는 영화다. 한 사람의 인생에 담긴 삶에 대한 교훈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길지만 느린 호흡을 지니게 된 것도 당연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통해 데이빗 핀쳐 감독은 말한다. 누군가는 버튼을 만들고, 누군가는 번개를 맞고, 누군가는 춤을 추듯이 모두가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있음을 말이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