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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윈슬렛의 작품인 '더 리더'의 원작을 읽어 보았다. 나체의 두 남녀가 목욕탕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관능적이면서도 묘한 느낌이 들어서 사실 금지된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보다 철학적이고 자기 비판적인 소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미하엘과 한나의 사랑 이야기 속에서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세대와 그 이후의 전후 세대 간의 침묵 그리고 과거의 죄악에 대해 갈등하는 독일인의 죄책감을 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의 초반부는 미하엘 베르크의 어린 시절에 찾아온 기묘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등학생 시절의 미하엘은 간염으로 인해 약해진 몸 때문에 길거리에서 구토를 하게 된다. 우연히 그에게 도움을 준 한나 슈미트라는 여인을 만나면서 미하엘은 성적인 흥분을 겪게 된다. 한나의 성의에 감사하다는 핑계로 그녀의 집에 찾아가던 미하엘은 한나의 주도 하에 성관계를 갖게 된다. 미하엘은 이중 생활을 통해 한나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아무도 모르게 한나와 만나던 미하엘은 마치 어머니에게 고백하듯이 자신의 학창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미하엘이 자신이 읽을 책을 말하자 한나는 미하엘에게 책을 소리내어 읽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후 미하엘은 한나를 만날 때마다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기묘한 사랑을 나눈다. 간염으로 쇠약해졌던 미하엘은 한나와의 만남을 통해 점점 주체성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하지만 미하엘은 자신의 또래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한나와의 만남이 소원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장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미하엘은 우연히 자신을 바라보는 한나를 목격하게 된다. 미하엘은 한나를 본 이후 그녀의 집을 찾아가지만 한나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미하엘은 자신이 한나를 부인함으로써 그녀를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한나에 대한 미하엘의 죄책감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다.

이후 대학생으로 성장한 미하엘은 자신의 법학 세미나 공부를 위해 나치 부역자의 재판의 방청객으로 참석한다. 그 곳에서 미하엘은 피고석에 서있는 한나를 목격하게 된다. 미하엘은 재판을 방청하면서 한나가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가두었던 수용소의 간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재판을 통해 교회에 수용되었던 유대인들이 화재로 죽음 직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여성 간수들 중 한 명이 한나였다는 사실에 경악 한다. 한편 피고의 유죄를 밝혀 줄 유일한 단서인 보고서의 필체를 비교하려 하자 한나는 자신이 그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진술한다. 필체를 비교함으로써 자신이 보고서를 쓴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변론을 포기하면서까지 필체를 비교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상식에 어긋난 한나의 행동을 본 미하엘은 왜 그녀가 자신에게 항상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는지 깨닫는다.

얼핏 보면 교회 안에 수용된 유대인들을 구해내지 않은 한나의 행동을 공감하기 힘들 것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구해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되돌아 본다면 과연 교회 안에 갇힌 유대인들을 풀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에 떨어진 포탄으로 인해 아비규환이 되어버렸고 유대인들을 감독하던 군인들은 부상자들을 이송한다는 핑계로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한나는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 이성적으로 판단 할만한 지식과 사유를 할 만큼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판단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판사를 향해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라고 묻는 한나의 질문은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려는 인간의 치졸함이 아닌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 알고 싶어하는 여인의 절박한 물음처럼 느껴진다.

또한 한나가 수용소에서 포로들에 대해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것은 다름아닌 감정의 마비에서 비롯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수용소의 규칙에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포로를 학대하고 그들을 처형하는 것이 마치 일상적인 업무처럼 여겨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인간성이 마비된 것은 비단 피고들만이 아니다. 미하엘을 포함한 방청객들 역시 나치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체 피고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는 것이다. 왜 방청객들은 나치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마비 증세를 보였을까. 그것은 바로 방청객들은 피고가 저지른 죄악을 자신들과 분리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치의 죄악은 단지 부역자들을 처벌한다고 해서 분리되거나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각이 마비된 체 재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에게 죄악을 몰아 넣은 뒤 수치와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것과 다름없다. 한나가 자신의 수치인 문맹을 숨기기 위해 종신형을 선택하는 비이성적인 행동처럼 나치라는 수치와 죄악에 대해 외면하는 것 역시 비인간적인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미하엘은 자신이 한나를 위해 그녀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 미하엘은 한나가 지키고 싶어했던 수치감을 드러내어 그녀를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한나의 진실을 묵인함으로써 다른 독일인처럼 나치라는 과거에서 자신을 분리할 것인가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미하엘은 수치를 숨기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한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철학 교수인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미하엘은 수치를 숨기기 위해 종신형을 선택한 한나의 동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어린 아이가 다른 사람들의 선호와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고집하듯이 한나도 종신형을 받는 것보다 자신의 수치인 문맹을 숨기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미하엘에게 한나를 외면하지 말고 그녀와 대화할 것을 충고한다. 아버지의 대답은 독일의 추악한 과거를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사람들과 대화를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죄악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다. 네 문제는 마음 편하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만약에 네가 서술한 상황이 그 사람에게 어쩌다가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유전적인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 너는 당연히 행동을 해야 한다. 네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이 좋은 건지 알고 있고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너는 당연히 그 사람이 그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주어야 한다. 물론 최종 결정은 본인에게 맡겨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해. 그 사람과 직접 말야. 그 사람 등 뒤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서는 안된단다. (p 154)

하지만 미하엘은 판사와의 면담을 하면서 끝내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나에게 이용당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자신의 삶에서 분리시켜 버린다. 이후 미하엘은 한나를 잊기 위해 삶에 몰두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하엘은 자신이 한나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미하엘의 결혼 생활은 얼마 안 돼 파탄이 나고, 한나의 재판 이후로 그는 법률가로서의 삶에서 도피하기 시작한다. 미하엘의 결혼 생활의 몰락은 어린 시절 한나에게 겪은 성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컴플렉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미하엘의 삶을 구속하는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미하엘이 한나에 대한 기억에 구속되는 이유는 바로 그녀와의 관계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은 체 애써 외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하엘의 교수의 장례식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한나와 미하엘 간의 관계에 대해 묻자 미하엘은 서둘러 그 곳에서 도망치듯이 빠져 나온다. 마치 나치 시절 독일에 대한 물음에 애써 회피하려는 독일인처럼 미하엘도 한나에 대한 기억을 마치 죄악처럼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치의 죄악으로 국가가 분단되고 모든 것이 폐허가 되버린 독일 속에서 살아온 전후 세대들은 나치와 자신을 분리시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자신은 나치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이므로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만 처벌하면 독일인들은 과거를 잊고 살아갈 수 있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히든'의 마지막 장면처럼 과거의 추악한 죄악은 끝내 잊을 수 없는 악몽이다. 결국 그 악몽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즉 과거의 독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죄악을 수용함으로써 이성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 계속 깨우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미하엘은 더 이상 한나를 외면하지 않은 체 그녀를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다시 출발하려는 미하엘의 의지는 '오디세이'에서 말하는 새로운 출발과 시도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귀향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결코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귀향을 믿겠는가.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것이다. <오디세이>는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의 이야기이다. 법률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p 194)

미하엘은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를 위해 책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녹음한 테이프를 한나가 수용된 교도소에 보내기 시작한다. 테이프를 통해 한나와 대화를 시도했던 미하엘은 몇 년 후 그녀로부터 편지를 받기 시작한다. 글을 쓰지조차 못했던 한나는 미하엘과 대화하기 위해 자신의 수치인 문맹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전후 세대인 미하엘과 대화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글을 쓰기 시작하며 대화를 시도하는 한나의 모습은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전후 세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나치 세대의 독일인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는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걸음을, 깨우침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중략)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여겨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랫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p 199~200)

미하엘은 음성 테이프를 통해 한나를 자신의 과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녀가 곧 출소할 것이라는 교도소장의 편지를 읽고 직접 그녀와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미하엘은 나이가 든 한나를 대면하면서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배신감을 잊고 그녀를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나는 출소를 앞둔 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녀의 극단적 선택은 미하엘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다. 왜 그녀는 출소를 앞두고 목숨을 끊었을까 하고 말이다. 한나의 죽음은 자신을 외면한 체 거리를 두었던 미하엘에 대한 원망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처럼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한나의 죽음은 그녀가 보관하고 있던 유품들과 그녀가 남긴 유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한나의 감방에 남겨진 책들은 흥미롭게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쓴 책들과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하엘이 음성으로 된 테이프를 보낸 이후로 한나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하엘이 보낸 음성을 듣기 위해 한나는 자신의 수치인 문맹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책을 빌려와 미하엘의 음성을 따라 책을 읽고 카세트가 고장날 정도로 반복하면서 글을 깨우친 한나는 미성년자같은 비이성적인 삶에서 벗어나 무엇이 올바르고 잘못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한나는 희생자들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행동이 왜 죄악인지 스스로 깨닫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같은 책들을 통해 자신이 나치의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한 때 한나는 자신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홀로코스트에 관한 글을 읽고 문맹이라는 수치가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비해 너무나 가치없는 것임을 깨닫고 죽음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심판한 것이다. 

미하엘은 한나가 남긴 마지막 유언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그는 교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 유대인 여인을 만난다. 마치 부모 세대의 죄악을 아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미하엘은 자신과 한나 사이의 관계를 솔직하게 고백한 뒤 한나가 평생동안 모은 재산이 담긴 깡통을 건네준다. 비록 그녀는 한나가 남긴 돈을 홀로코스트 피해자에게 쓰는 것을 거부하지만 한나가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문맹과 관련된 단체에 기부하는 것을 허락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직접적인 대면과 용서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하엘은 부모 세대인 한나를 대신해 피해자를 찾아감으로써 그녀의 유언을 실현한 것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땐 완벽히 미하엘의 감정에 몰입할 수 없었다. 미하엘이 한나에 대해 잊지 못하는 내면을 서술한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아닌 그 전 세대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과거의 죄악을 자신과 분리하지 않은 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대화를 시도해보려는 미하엘과 한나의 노력은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미하엘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문맹을 고백하면서 글을 배우려고 했던 한나의 모습은 절실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졌으며 뒤늦게 한나의 심정을 이해하면서 그녀의 유언을 지켜준 미하엘의 모습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과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속죄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런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