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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2008)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는 성인이 된 미하엘이 지나가는 전차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학창 시절 시작된 한나와의 인연을 순차적으로 진행해 간다. 흥미로운 점은 미하엘의 추억을 더듬어가는 과정의 사이에 현재의 미하엘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어린 시절의 미하엘과 현재의 미하엘의 모습을 분리하지 않은 체 과거의 회상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나와 자전거 여행을 한 후 어린 미하엘이 그녀에 대한 감정을 담은 시를 적는 장면 뒤에 나이 든 미하엘이 어린 시절 적었던 시를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는 장면으로 연결함으로써 한나를 바라보는 미하엘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다. 또한 현재의 미하엘이 딸과 만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장면 뒤 대학생 시절의 미하엘이 한나의 숨겨진 과거를 알게 되는 과정을 전개함으로써 그가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한 체 살아가게 된 사연을 드러낸다. 이처럼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한나에 대한 기억을 순차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 숨겨진 역사의 비극을 드러낸다.

'더 리더'는 원작을 비교적 충실히 옮겼지만 일부 장면을 각색하여 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예를 들어 미하엘이 한나와 함께 자전거 여행을 떠난 후 보여지는 교회 장면은 한나의 숨겨진 과거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교회 안에 앉아 희비가 엇갈리는 한나의 표정만으로도 그녀의 미묘한 심리를 읽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원작에서 미하엘의 내면을 통해 과연 독일 2세대는 전범자에 대한 처벌 후 침묵으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문제 의식을 드러내는 부분을 영화는 대학생이 된 미하엘과 동료 대학생 간의 토론을 통해 과연 재판에 회부된 전범자들에 대한 사정과 이해 없이 그들을 단호하게 처벌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원작의 주제의식과는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지만 전범자들에 대한 두 가지 시선을 토론 장면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각색이었다고 생각한다. 데이빗 크로스가 연기한 젊은 시절의 미하엘의 모습을 통해 한나를 바라보는 그의 내면적인 고뇌와 갈등을 영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며, 대학 교수로 출연하는 브루노 간츠의 모습도 반갑게 느껴진다.

다만 아쉬운 점은 미하엘이 20여년 후 한나와 재회한 후 벌어진 비극을 다루는 방식이 원작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교도소에서 한나는 과거의 죄에 대해 깨닫지 못한 체 미하엘을 맞이하지만, 미하엘은 그런 한나의 태도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다. 미하엘이 식당에서 나가자 한나는 충격에 빠진 체 어쩔줄 몰라 하더니 결국은 자신이 읽던 책을 받침대로 삼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원작에서는 한나의 감방에 있는 유대인에 관한 책들과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통해 그녀의 죽음이 책을 통한 이성적인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하는데 반해, 영화는 한나가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 계기를 책이 아닌 미하엘의 만남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한나에 대한 미하엘의 애증에 가득찬 행동 이후 한나가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의 전 재산을 유대인 희생자에게 남기라는 유언을 남긴다는 설정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하엘과의 만남이 그녀가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계기는 될지 몰라도 미하엘의 표정과 태도만으로 자신의 과오를 인식조차 못하던 한나가 유대인에 대한 반성까지 이른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랄프 파인즈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 덕분에 영화를 보면서 원작과 다른 영화의 묘사에 대해 어느 정도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한나 슈미트를 연기한 케이트 윈슬렛은 이성적인 사유를 하지 못한 체 재판에 임하는 모습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젊은 시절의 미하엘을 연기한 데이빗 크로스도 한나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재판 이후 그녀에 대한 배신감과 당혹감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현재의 미하엘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쓸쓸한 눈빛으로 과거의 기억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통해 미하엘이 한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잘 전달하고 있으며, 한나를 대신해 유태인 희생자의 딸을 찾아가는 장면과 미하엘의 딸에게 한나와 관련된 자신의 과거를 힘겹게 털어놓는 장면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