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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달콤 쌉싸름한 무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달콤 쌉싸름한 무대


Germany; 120min; Semi-Documentary
Cast: 토마스 쿠친스키 외 7명
2009. 3. 27~3. 28: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신문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텔레비전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 사이 책을 보고, 컴퓨터 화면을 보고, 광고를 보고, 사람들도 본다. 그다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가끔은 공연도 보고, 영화도 본다. 보는 것은 일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늘 사실이다. 때로는 진실에 가깝기도 하고, 때로는 진실에서 한참 벗어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진실만을 본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간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회의로 가득찬 눈으로 우리는 단 하루를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현실에서 허구와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고 명료하고 편이하게 구분되어 있는 개념이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면 사실의 다른편에 완전한 허구의 영역이 존재한다. 가장 쉽게 영화, 드라마, 소설, 연극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극장에 들어설 때, 소설의 페이지를 넘길 때 우리는 속편하게 허구의 세계가 제공하는 이야기 속에 흠뻑 취할 준비를 한다.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 낸 허구의 세계... 앙드레 바쟁이 현실의 깊이를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리얼리즘 영화를 갈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그도 인정했듯이) '현실의 재현'이다. 그래서 영화든, 소설이든 그것은 현실의 환영이자, 한편으로는 현실의 도피처가 된다.

연극도 다르지 않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몸을 움직이고 대사를 뱉어내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아무리 실제 일어난 일을 토대로 극을 꾸몄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재현에 그친다. 배우들이 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허구를 더욱 사실처럼 만들기 위함이다. 그것이 허구라는 것 자체를 관객이 느끼지 못하도록 애초에 봉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무대와 관객이 암묵적으로 맺고 있는 일종의 계약이다. 그리고 이 계약이 지금까지 연극을 유지시켜 온 바탕인 것이다. 온갖 종류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y)가 있다 하더라도 이 계약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절대명제와도 같은 이 '계약'이 무대 위에서 의도적으로 해체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독일의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이 국제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 기간 동안 상연됐다. 애초에 세계 근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마르크스의 난공불략의 책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얼마나 쇼킹한 일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공연장을 찾았지만 무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새롭고 신선한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공연은 자본론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극화'한 것이 아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간단히 설명하면 현재를 살아가는 8명의 인물이 과연 두 세기 전에 출판된 '이 책'과 어떤 인연을 맺고 있는지를 각자의 입을 통해 무대에서 들려주는 것이다. 8명 중에는 노동자, 대학교수, 경영인, 영화감독, 학생, 통역가, 시각장애인 등 다양한 군상들이 포함돼 있다. 중요한 것은 8명의 인물들이 모두 전문배우가 아닌 실제 직업인들이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모두 자신의 인생 중 실제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곧 그들이 연기하는 인물은 그들 자신이다. 앞에서 말했던 관객과 무대 사이의 계약이 파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관객은 이 무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무대 위의 세계는 사실일까?, 허구일까?> <그것은 현실인가?, 현실의 재현인가?> <자본론 제1권>은 너무도 명확히 구분되어 있던 두 개념의 경계를 해체하는 실험을 무대 위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무대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에 연결된 비디오 영상은 이런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다.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해체이냐." 는 점이다. 솔직히 리미니 프로토콜이 실험적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단 한 번의 관람으로 속뜻까지 하나하나 짚어내기에는 연극에 대한 내 내공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다만 해체의 중심에 '소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본다. 물론 그 소통은 무대와 관객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굳어진 연극의 소통 방법은 잘 짜여진 극본과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상황과 잘 어울리는 무대 장치 등으로 요악할 수 있다. 하지만 <자론론 제1권>은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비전문배우들이 기댈 만한 탄탄한 대본은 없고, 인물들 역시 연기를 억지로 잘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사를 잊기도 하고, 동선이 뒤틀어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관객과 무대 사이에는 시종일관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 극에 대한 완전한 몰입을 거부한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즉, <자본론 제1권>의 커뮤니케이션은 평범한 연극 무대가 만들어 놓은 소통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8명 인물들의 행동이나 대사는 종이에 적힌 것을 단순히 흉내내는 것이 아닌 즉흥적으로 표현되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물론 극의 순서가 정해져 있겠지만 자신의 차례에서 배우들이 내뱉는 말은 고정적이라기보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다. 또한 그들은 대사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닌 관객과 대화를 한다. 공연 도중 배우가 객석으로 뛰어들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이제는 유행처럼 되어 버린 짤막한 퍼포먼스가 아닌 <자본론 제1권>은 정말 관객과 배우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공연 전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공연 도중 무대 책장에 가득 꽂혀 있던 자본론이 객석으로 전달되고, 실제 한국어판 번역을 맡은 학자와 함께 책의 주요 내용을 낭독한다. 이것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무대와 객석, 현실과 허구를 이어주는 가교인 셈이다. 공연이 시작하고 낯선 설정에 당황했던 관객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소통의 방법에 적응을 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꽤 걸렸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뛰어 넘는, 그 구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리시버(receiver)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의도적으로 쏟아내는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포획된 사람이 아니다. 함께 무대에 참여하고, 메시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공연의 주체'가 된다. 진정으로 '관객을 위한, 관객을 주인공으로 하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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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니 프로토콜의 연출자와 대표(사진: 한겨레 신문)

개인적으로 리미니 프로토콜의 계속된 실험은 "관객과의 소통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의 고민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이 실험적인 극단은 그 답을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도전에서 찾고자 한다. 세미 다큐멘터리(semi-documentary) 연극이라고 이름 붙여진 괴상한 무대는 연극과 다큐멘터리의 조합을 통해 사실과 허구의 해체라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소통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이종 결합 혹은 경계 해체는 연극에 비해 영화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이뤄졌던 것 같다. 지아장커의 경우처럼 극영화에 다큐멘터리의 화면을 삽입하는(스틸라이프), 반대로 다큐멘터리에 꾸며진 이야기를 삽입하는(24시티) 방법은 이야기가 완전한 허구도, 완전한 사실도 아님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관객과 새로운 종류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연극이 물론 영화에 비해 현실적인 제약이 많은 분야이기는 하지만 <자본론 제1권>에서 볼 수 있는 스스로 틀을 깨고자 하는 시도는 관객의 입장에서 충분히 고맙고, 의미 있는 일이다. 머리는 복잡하게 만들지언정 계속해서 곱씹게 만드는, 그래서 답을 얻는 것이 아닌 스스로 안에서 떠오르게 만드는 경험은 쓰지만 자꾸 생각나는 초콜릿의 달콤함과 닮아 있다.

연극의 새로움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더니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빼먹은 것 같다. 왜 리미니 프로토콜은 마르크스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을 무대 위에 올려야 겠다고 생각했을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그만큼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책이다. 분량도 부담스럽고, 내용도 어렵다. 그만큼 현실에서 마르크스는 '실체'보다 '허구'로 떠돌아다니는 '유령'과도 같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한다면 리미니 프로토콜이 마르크스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현재 자본주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병폐들은 어쩐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던 시기와 너무도 닮아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자본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을 비도덕적, 비윤리적으로 몰아가는 지금은 마르크스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라고 인정했던 19세기 후반의 상황에서 조금도 낳아진 바가 없다. 오히려 그 구조가 확대, 강화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꾸준히 시험하는 이 극단에게 마르크스는 현실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의 생각이 통째로 현실 자본주의를 교체해야 한다는 위험한 생각은 아니다. 다만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라는 자신감에 벅찬 선언이 더 이상 의미를 잃은 지금 마르크스가 가진 인간에 대한 예의와 따뜻한 세계에 대한 열망이 하나의 알림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황'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미국에서 출발한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 마르크스가 다시 주목받고, 읽히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온기가 없는 자본의 흐름,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노동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에서 함께 읽었던 <자본론>의 문구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본다.

-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내는 데 있다.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富)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직접'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 자본가는 다른 모든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구매한 상품(노동자)의 사용가치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효용을 얻어내려고 한다.
- 노동수단은 기계의 형태를 취하자마자 곧바로 노동자의 경쟁상대가 된다. 기계를 통한 자본의 자기증식은 기계로 말미암아 생존조건을 박탈당한 노동자 수에 비례한다.
-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력을 구매하는 목적은 노동력의 용역이나 생산물을 통해 구매자의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구매자의 목적은 자기 자본의 가치증식에 있다. 즉 그기 지불하는 것보다도 많은 노동을 포함하는 상품의 생산에 있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큰 장점은 그것이 끊임없이 임노동자를 임노동자로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본의 축적에 비례하여 임노동자의 상대적 광잉인구를 늘 생산해낸다는 점에 있다. 그럼으로써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올바른 궤도 위에서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종속이 보장된다.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축적양식(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은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의 절멸(노동자의 수탈)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도이칠랜드2) 공연 모습





P.S. 1
리미니 프로토콜의 공연은 작년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기념으로 콜커타(call cutta in a room) 이후 두 번째 공연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작품이 있다고 한다. 홈페이지의 작품 목록만 봐도 오감이 짜릿하다. 국내에서도 더 많은 작품으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http://www.rimini-protokoll.de/website/en/index.php

P.S.2
더 늦기 전에 자본론은 읽어봐야 겠다. 책장에 꽂혀서 묶은 때만 쌓이는 게 안쓰러워서라도 안되겠다.

P.S.3
국제다원예술제를 모토로 내세운 페스티벌 봄(Festival Bo:m)이 진행 중이다. 올해로 벌써 세 번째 행사다. 서울의 곳곳에서 연극, 영화, 미술, 무용 등 서로 다른 분야들이 흥미로운 '통섭'을 시도하고 있다. 분명 의미 있는 기획이고, 꼭 필요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좋은 프로그램으로 계속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짚어 넘어가야 할 문제점이 꽤 있는 것 같다.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에서도 배우들의 대사와 자막이 잘 매치되지 않아 불편함이 있었다. 회원가입을 해야지만 프로그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도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다. (게시판에 불만이 많아서 그런지 곧 개선됐다.) 가장 아쉽고 안타까웠던 점은 10시간에 가까운 독일 영화를 자막없이 상영한 점이다. 알렉산더 크루게가 마르크스를 테마로 만든 인터뷰 형식의 영화 <이념적 고물로부터의 뉴스: 마르크스-에이젠슈타인-자본론>은 <자본론 제1권> 만큼이나 기대가 컸던 작품이다. 인터뷰로 이뤄지는 영화를 자막 없이 밤을 세워 보라니 도무지 대중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상영이 갑자기 결정됐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페스티벌의 이름이 '봄(보다)' 인데 볼 수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