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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해피 투게더> 장국영을 추억하다.

<해피 투게더> 장국영을 추억하다.


HongKong; 1997; 96min; Drama
Director: 왕가위
Cast: 장국영, 양조위, 장첸


 
1980년대와 90년대를 중,고등학생으로 보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장국영에게 빚지고 있는 사연 하나 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특히 만우절 정말 거짓말처럼 떠나버린 그의 마지막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난 그 때 군대에서 제대를 100일도 남겨두지 않은 노쇄한 말년 병장이었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 없이 만족스런 표정(달력이 한 장 넘어가는 날이었으니까...)으로 달력에 X표를 하고, 병장들만 쓸 수 있다는 사제 폼클렌징와 함께 세면장에 들어섰던 걸로 기억한다. 곧 밖에서 만날 사람들에게 보다 탱탱한 피부를 보여주겠다는 각오 하나로 구석구석을 씻던 중 뒤따라오는 후임이 허겁지겁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장국영이냐..." 난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무심한 듯 핀잔을 줬다. 만우절 농담치고는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라리 내 제대 날짜가 밀렸다는 구라를 치지..." 하지만 뉴스를 통해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뭐라 감정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동창회 모임에서 오래 전 같이 죽고 못살던 친구의 안부가 아닌 부고를 들었을 때의 느낌이 이럴까. 솔직히 아직까지도 그의 죽음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를 열렬히 좋아했던 그 때도 장국영은 현실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딘가 내가 숨 쉬는 세계와는 다른 공간에서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 여전히 그는 어디에선가 늙지 않고 나이를 먹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 홍콩영화는 본격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국 반환이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 전부터 감지되던 홍콩영화의 매너리즘과 지리멸렬함이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홍콩영화의 운명과 함께 장국영의 이름을 떠올리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관심도 희미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피터팬과 같은 표정과 동작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았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견디기 힘들었을 그의 외로움에 나 역시도 가볍지 않은 돌 하나를 얹은 기분이었다. 슬프지만 그의 죽음이 그를 온전하게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줬던 것 같다. 그를 추억함이 미안함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과거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나의 사춘기 시절도 오랜만에 먼지를 걷어내고 한바탕 신나게 머릿속을 헤짚고 다녔다. 그가 선물처럼 주고 간 사춘기의 알싸함을 난 그와 동시에 잊고 지내고 있었다. 난 장국영, 그의 음악, 그의 영화와 함께 어떤 10대를 보냈을까.


중학교 때 학원에서 만난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난 장국영이 녹음한 야반가성의 OST를 선물했던 기억이 있다. 음악을 듣고 "고마워, 노래가 너무 좋았어..." 라고 말하면 같이 그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던 것 같다.) 결국 기대했던 해피엔딩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장국영의 음악과 영화는 나의 사춘기 시절과 오롯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나도 잊어버린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같은 해 나온 앨범 <총애장국영>은 거의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것 같다. 묘한 재즈풍의 <풍월> 삽입곡 A thousand dreams of you는 셀린 디옹, 마이클런스투락, 퀸의 노래와 함께 당시에 내가 외우고 다니는 몇 개 안 되는 영어 노래였고, <야반가성>의 삽입곡 야반가성과 심정상옹은 눈을 감고도 부를 수 있는 중국어 노래였다. 야반가성의 발음을 한글로 옮겨 놓은 음악잡지를 오려다가 수없이 되풀이하며 의미도 모르는 가사를 외웠다. 왜 그렇게 그 노래를 외우려 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긴 지금의 감수성으로 그 때의 감수성을 이해하려는 것이 무리이기도 하겠다. 암튼 난 '즈요우짜이예션 워흐어니짜이넝 창카이링헌 취스팡티엔젠~~~'을 연신 중얼거리고 다녔었다. (난 아직도 이 노래를 외워서 부를 수 있다!!!) 그 날 4월 1일 난 그의 죽음 때문에 현실같은 꿈을, 꿈같은 현실을 보냈다. 장국영을 추억하며 자연스럽게 되살아난 사춘기의 기억에 약간 센치해지면서 말이다. 하긴 그래봤자 군대 아니었나. 야반가성을 듣고 싶어도 귀에 들리는 건 "OOO 병장님 점심 드시러 가지 말입니다." 였으니...

그리고 또 6년 가까이 지났다. 세상에나 시간 참... 그 만큼 시간에 비례해 장국영은 또 기억에서 잊혀졌다. 이제 그는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처럼 만나는 케이블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배우가 됐다. 슬픈 일이지만 그의 음악도, 영화도 이제는 도서관에서나 존재하는 듯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그와 함께 사춘기와 청춘을 보냈던 이들이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서울의 한 극장에서 장국영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영웅본색1, 영웅본색2, 해피투게더, 야반가성, 가유희사, 아비정전, 백발마녀전> 솔직히 그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소박하기 이를 때 없는 차림상이다.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파편들을 통해 그의 전체를 추억할 수 있는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스크린에서 그를 만나고, 그를 추억함이 그가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지금, 가슴 떨리는 사춘기를 선물해 준 은인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제는 밥 먹으러 가자고 눈치 없이 보채는 후임병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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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해가 막 저물 때쯤 극장을 찾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매를 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니 장국영 그가 남긴 흔적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늘 썰렁하던 극장에 사람이 붐벼서 그런지 극장 직원들도 꽤 당황하는 눈치였다. 발권이 늦어져 상영도 10분 늦춰지는 등 낙원상가 4층이 모처럼 만에 북적북적 그야말로 극장 다워 보였다. (모스필름 회고전이 열리는 시네마테크는 상대적으로 관객이 적어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시간이 지연되는 것에 상관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의 홍조는 변함이 없었다. 영화 자체가 주는 설렘만으로 극장의 분위기가 이렇게 긴장될 수 있다는 것에 묘한 감동도 받았던 것 같다.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부터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 그리고 갓 대학생이 된 듯한 학생들까지 고른 연령층의 관객들 역시 새롭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작품은 왕가위 감독의 1997년도 작품 <해피 투게더>. 이번 회고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일 것이다. <춘광사설>,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 세 가지 제목으로 알려진 영화는 파격적인(?) 동성애 묘사로 인해 국내 개봉 당시 일부를 들어내고 상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반발심 때문이었던가 난 개봉 당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무삭제로 처음 상영되는 <해피 투게더>... 지금 보면 파격적이라는 말이 왠지 민망하기까지 하다.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장국영이, 아니 보영이 스크린에 모습을 보였다. 한 동안 잊고 지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의 모습에서 불안과 외로움이 비친다. 여린 얼굴의 보영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한껏 몸을 움추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낯선 아르헨티나에서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가시를 세우고 자신을 단단하게 지키려는 듯... 그의 옆에 아휘(양조위)가 있다. 보영에 대한 사랑 말고는 그를 지탱시켜주는 것이 없는 듯 보인다. 보영을 사랑하기에 함께 아르헨티나까지 왔고, 보영과 함께 이과수 폭포를 찾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보영은 아휘에게 지친 듯, 일상이 되어 버린 그들의 반복된 사랑에 지친 듯, 홍콩과 다를 바 없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지친 듯 그렇게 떠난다.

홍콩의 우울한 거리를 비추던 왕가위 감독의 카메라는 똑같이 희망을 찾을 길 없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골목골목과 사람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 골목과 사람들 속에 아휘와 보영이 살고 있다. 홍콩을 피해 흘러들어 간 곳. 하지만 지구 반대편 그 곳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찾지 못한다. 아휘와 보영이 마주한 현실은 비슷한 일상과 비슷한 일탈 뿐이다. 결국 보영은 지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휘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불안과 두려움은 아휘를 사랑함에도 다시 그를 떠나게 만든다. 남은 아휘는 보영을 가슴에 묻는 법을 익힌다. 그리고 보영과 함께 오기로 했던 이과수 폭포를 끝으로 아르헨티나를 떠나 홍콩으로 돌아온다. 그와 보영의 추억은 창(장첸)의 녹음기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앙코르 와트에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를 묻은 차우처럼, 아휘는 창의 녹음기에 '춘광사설(봄 햇살처럼 짧은 사랑)'을 두고 떠난 것이다. 세상의 끝을 향하는 창은 그 곳에 아휘의 아픔을 놓고 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세상의 끝 아슈야의 등대에서 그는 아휘의 아픔(눈물)을 바람에 흘려 보낸다. 하지만 아휘와 창, 둘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 우연히 대만을 들른 아휘가 그 곳에서 창의 흔적을 발견하듯,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Happy Together...

혼자 남은 건 보영 뿐이다. 자신의 사랑을 두려워 했던 것에 대한 벌을 받듯 그는 아휘가 떠난 흔적을 더듬을 뿐이다. 아휘가 머물렀던 곳을 닦으며, 그를 위해 담배를 채워놓고, 그가 앉던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린다. 아휘가 일하던 곳을 찾아 그를 찾지만 보영에게 남은 건 지독한 외로움 뿐이다. 아휘는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보영은 그렇지 않기에 혼자 그 지독한, 절망 같은 외로움을 견녀내야 한다. 영화 속 보영의 마지막 장면에서 순간 장국영의 모습이 보였다. 떠나간 아휘의 이불을 끌어안고 이제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보영... 평생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이 두려워 아무도 모르는 순간 혼자 눈물을 쏟아내야 했던 장국영의 외로움이 묻어났다면 무리였을까. <해피 투게더>는 보영에게 '해피 투게더'를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영화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서랍장을 뒤져 장국영의 흔적들을 찾아봤다. 근데 총애장국영 테이프와 해피투게더, 동사서독 포스터, 아비정전 비디오테이프가 전부다. 그 많던 것들은 다 어딜 건건지...


솔직히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가 아닌 장국영의 <해피 투게더>를 보고 왔다. 자신만의 영화 언어로 뚜렷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는 왕가위는 해피 투게더를 통해 더욱 원숙한 미학과 언어,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해피투게더> 이전의 왕가위보다 이후의 왕가위를 더 좋아한다. (역시 <해피 투게더>와 <화양연화>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다.) 사실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를 봤다면 인물의 심리를 그대로 담아낸 마치 시와 같은 그의 영상과 더불어 홍콩 반환(1997)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을 것이다. (난 <해피 투게더> 속에 홍콩의 중국 반환에 대한 감독의 희망 혹은 안정감이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왕가위와 양조위, 장첸에게는 미안하지만 시선이 향했던 것은 오로지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이 뱉어내는 대사와 움직임이었다. 그를 추억하고, 그와 함께한 내 사춘기를 추억하기 위해 그곳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보이지만 깊은 외로움이 묻어나는 보영이 왠지 장국영의 실제 모습과 가장 닮은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욱 몰입을 했던 것 같다. 그의 인생을, 그의 죽음을 둘러싼 확인되지 않은 많은 얘기들이 흘러다니지만 그런 것들에 귀를 닫으려 한다. 애초에 장국영은 영화 속에서 살며 말을 건네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난 앞으로도 영화 속에서 살아 있는, 늙지 않는 장국영을 기억할 것이다. 내 알싸한 추억과 함께...



P.S.1
오랜만에 <총애장국영> 앨범을 듣고 싶어 테이프를 꺼냈는데 오디오에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다. 포기하려던 찰나 '찍찍이(공식명칭: 어학기)'가 눈에 들어왔다. 토익 리스닝 찍찍대던 스피커에서 장국영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어색하지만 나름 분위기가 있다. 어딘가 모르게 앤틱한 분위기???

P.S. 2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인가?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부르짖으면서 중국식 이름을 원어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장만옥은 장만위가 됐고, 유덕화는 류더화가 됐고, 여명은 리밍이 됐다. 어찌 보면 그렇게 불러야 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 이름에는 왠지 추억이 빠져 있는 듯하다. 난 량차오웨이보다는 양조위가 좋고, 장궈룽보다는 장국영이 좋다. 장개석을 장제스로, 등소평을 덩샤오핑이라고는 부를 수 있지만 양조위는 양조위고, 장국영은 장국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