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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웬디와 루시] 담담하지만 절박한 로드 무비


내가 영화에서 보았던 미셸 윌리엄즈는 <스테이션 에이전트>(2003)에서의 순진한 도서관 사서와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서 히스 레저의 소심한 아내 정도이다. 연기력은 뛰어난 편이지만, 배우치고 아주 매력적인 외모는 아니고, 금발머리에 왠지 순박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2008년 1월에 그녀의 인생은 큰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만 세 살도 채 안 된 딸 마틸다 로즈의 아버지인 히스 레저의 갑작스런 죽음. 20대 후반의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을 시련이었을 것 같다. 물론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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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와 루시>에서의 미셸 윌리엄즈는 전작들에서의 느낌과 매우 다르다. 머리를 짙은 색으로 염색하고 짧게 잘랐다. 부쩍 여윈 몸매와 보이시한 커트 머리가 그녀를 오히려 더 어려보이게 만들지만, 내면의 깊이는 한층 더 깊어진 느낌이다. 집도 직장도 없는 주인공 웬디 캐롤은 유일한 동반자인 개 루시와 함께 여행하며, 낡은 차에서 잠을 해결하고, 남은 현금에 대한 가계부를 절박하게 기록해 나간다. 그녀의 단 하나의 희망은 알래스카에 가면 일자리가 있을 거라는 것이지만, 집을 구하려면 주소가 필요하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직장이 필요한 이 세상에서 알래스카까지의 여행은 험난하기만 하다.

그녀가 겪게 되는 삶의 고비들은 경제적 난관으로 인해 몇 배의 비극으로 커져버리고, 도움의 손길을 청할 곳 없는 낯선 곳에서 절망은 매 순간 견디기 힘든 무게로 다가온다. 구스 반 산트 영화들의 배경으로 익숙한 오레곤 주 포틀랜드의 황량한 풍광 속에서 몇 안 되는 조연 캐릭터들은 현실에서 걸어나온 듯이 생생하며, 미셸 윌리엄즈의 고독하고 쓸쓸한 내면이 아프게 배어나오는 서늘한 표정의 연기는 진심으로 다가와 마음 속 깊이 박힌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에서 자발적으로 무숙자가 된 에밀 허쉬의 필사적인 분투가 왠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자발적인 홈리스들의 고난에 비해 왠지 사치스러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성 감독인 Kelly Reichardt 는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주목해야 할 보석을 또 하나 만들어 내었다.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