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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게공선> Between 1929 and 2009


<게공선> Between 1929 and 2009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역, 문파랑, 2008

1. 1925년 소련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영화 <전함 포템킨>

영화의 배경은 1905년 황제 짜르가 러시아를 통치하던 시기. 전함 포템킨에 몸을 실은 병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학대와 열악한 근무환경에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러던 중 자신들이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이 썩은 고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억누르고 있었던 그들의 분노는 함선 내 봉기로 이어진다. 봉기에 성공한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사람들이 오뎃사 항구로 모여든다. 하지만 함선의 봉기가 시민 봉기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한 짜르의 코사크 군대는 총과 칼을 내세워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한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에 대한 폭력적 진압은 오히려 시민과 군을 결집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그리고 혁명이 시작된다. 단지 충동적인 반항이 아니다. 그 저변에는 짜르 시대에 축적된 모순과 불만이 엉켜 있다.

2. 1929년 일본

러시아의 1차 혁명 이후 25년이 지났다. 1929년 연합국을 도와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서구 강대국의 아류국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맹주로서 자리를 잡았다. 식민지는 굳건했으며,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정치는 번성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그대로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은 공황으로 인한 본토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밖으로 눈을 돌렸다. 전장이 확대될수록, 세계 곳곳에서 황군의 승전보가 전해질수록 일본의 군국주의는 더욱 단단해졌다.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천황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국민' 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반항과 저항은 곧 '공공의 적'으로 매도됐다.



3. 1929년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 <게공선 蟹工船>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훗카이도의 하코다테. 게 공선 하쓰코호號에 노동자들이 오른다. 전국 각지에서 배를 타기 위해 모여든 어업노동자, 선원, 보일러공, 잡일꾼 등이 그들이다. 누구는 더 나은 벌이를 찾아 왔고, 누구는 좋은 직장이라는 꼬임에 빠져 왔으며, 누구는 어쩔 수 없이 매번 배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지옥'이다. <선박이 아닌 공장선이기에 항해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그렇다고 공장법의 적용도 받지 않았던> 이 무법지대에서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겪어내야 한다. 캄차카 반도 인근의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다를 견디며 일을 해도 그들에게 엄청난 보수와 복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얻은 이익은 고스란히 배를 소유한 자본가들의 몫이다. 자본가가 실재하지 않은 배 안에서 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감독을 비롯한 배의 '윗사람'들. 그들 역시 자본가에게 고용된 사람이지만 배 안에서 그들은 자본가의 노릇을 대신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노동자들이 쉬지 않고 생산량을 늘리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황민이되어야 한다고 다그칠 뿐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비인간적인 폭력과 살인적인 노동 뿐이다. 감독에게 노동자들은 먹고, 씻고, 자고, 싸고, 나머지는 죽자고 일을 시켜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서 생존의 갈림길에서 천황의 자랑스런 국민이라는 '립서비스'는 아무 필요가 없다. 감독의 무자비함과 자본가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은 결국 층층이 쌓이던 하쓰코호의 노동자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다. 결국 하쓰코호의 노동자들은 집단행동을 결의하고 대표들은 감독을 포함한 간부들과 협상을 시도한다. 하지만 평화롭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들의 기대는 순식간에 끝나 버린다. 힘없는 노동자의 편이라 믿었던 군대는 그렇지 않았다. 국가와 자본가, 그리고 군대는 각자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하나로 뭉쳐 있다. 그리고 노동자는 그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대상일 뿐이다. 1929년 일본에서 노동자의 의미는 생산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군대의 무력 진압에 그들의 봉기는 짧게 끝이 난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그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은 들고 일어섰다. 다시 한 번 더.>



4. 그들의 분노는 슬픔이었다.

하쓰코호에는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갑판 위의 세계. 감독, 선장, 잡부장, 공장대표가 그곳의 주인이다. 그리고 다른 세상이 있다. '똥통'이라고 불리는 갑판 아래의 세계. 이와 벼룩이 들끓고, 악취가 지배하는 그 곳에 어업노동자, 선원, 잡일꾼, 보일러공이 있다. 노동자들은 원형감옥에 갇힌 죄수마냥 일거수일투족을 감독에게 감시 당한다. 그들에게 저항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노동력과 돈이 맞교환 되는 계약관계에서 항상 우위는 노동력이 아닌 '돈'을 쥐고 있는 쪽이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노동력 공급의 과잉은 마르크스가 밝히고 있듯이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를 무한 재반복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핵심 법칙이다. 당장을 살아야하는 노동자들에게 자본가는 결국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럼에도 하쓰코호의 노동자들이 총과 칼도 없이 포템킨의 병사들이 그랬듯 저항을 시도한다.

어떻게 그들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캄차카 인근에서 조업을 힘들게 했던 바다와 추위는 그들이 견딜 수 없는 시련이 아니었다. 하쓰코 호에 몸을 실은 노동자들은 바다로 인한, 감독으로 인한 온갖 고통을 이겨내지만 결국 그들을 뭉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마저 빼앗긴 동료의 주검을 마주하고 나서였다. 즉 마지막 불을 당긴 화살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조차 갖을 수 없는 '슬픔'이었던 것이다. 원망과 분노를 넘어선 슬픔. 그 슬픔이 하쓰코 호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짙게 배어 들어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단지 자본가를 위한 생산수단이 아닌 모두 평등한 인간으로서 무엇이 우선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쓰코 호 노동자들의 절규가 공히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이유 역시 이 슬픔에 있다.

5. 게공선을 넘어

게공선의 슬픔은 게공선 만의 것이 아니다. 책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도시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슬픔은 넘쳐난다. 광업, 임업 노동자들 역시 하쓰코 호의 노동자 만큼이나 절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하쓰코 호를 넘어 전체 일본 사회에 드리워진 노동자들의 피폐한 생활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 것이 아니라 과감히 깰 수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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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다키지의 시신 - 사진출처 : 절망한 일본 젊은이들, 80년 전 소설에 열광하다 - 오마이뉴스 (시라카바문학관 다키치 라이브러리)

6. 반대편의 실체

고바야시 다키지는 해결책을 말하기 앞서 노동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들의 실체를 밝히는데 주력한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실체'를 밝히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들. 고바야시 다키지는 그 곳에 자본가, 국가, 군대를 한 편에 세워두고 있다. 국가와 군대로 대표되는 공권력은 모두 자본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고, 군대가 그런 자본가를 보호한다는 것. 그 관계에서 노동자는 국가와 자본가에 의한 이중의 착취 대상이 될 뿐이다. 나아가 노동자들은 국가와 자본가가 유도한 경쟁과 갈등의 구조 속에 스스로를 할퀴며 살아갈 뿐이다. 감독 역시 자본가의 대리인의 노릇을 하고 있지만 노동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노동자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감독은 파업을 야기한 책임을 지고 회사로부터 무일푼 해고를 당한다. 그리고 "아아 분한다! 내가 지금껏, 젠장, 속고 있었어!" 라며 절규한다. 그 역시 착취의 대상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내릴 수 있는 해결책은 분명해진다. 노동자들은 누구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 스스로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

7. 답은 무엇인가?

하쓰코 호 노동자들의 첫 번째 봉기는 너무도 짧게 끝이 난다. 어업노동자, 잡일꾼, 선원, 보일러공의 9명 대표들이 감독을 찾아가 담판을 짓지만, 총을 들이대는 감독을 보기좋게 후려친 것으로 그들의 만족은 끝나야 했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그들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배운다. 즉, 몇 명의 주도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 전체가 행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바야시 다키지가 '태업'을 주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 역시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덧붙이는 말'에서 "조직, 투쟁이라는 위대한 경험을 처음으로 알게 된 어업노동자와 젊은 잡일꾼들이 경찰서의 문을 나서자 다양한 노동계층 속으로 각각 파고들게 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실패가 포기가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밝히고자한 것이다.



8. 2009년에 읽는 <게공선>

비슷한 시기 각각 소련과 일본에서 완성된 에이젠슈타인과 고바야시 다키지의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을 보인다. <전함 포템킨>이 '(혁명으로 이어지는)봉기' 자체에 초점을 두고 전개된다면,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은 노동자들이 행동을 하기까지 처절하게 이어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투쟁의 필연성 내지는 윤리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생각이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저자가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이름'을 모두 제거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각각 인물들에게 노동자로서 보편적인 문제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효과도 있었겠지만, 개인이 아닌 몰개성의 집단으로만 노동자를 요구한 것은 현재로서는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가치와 요구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역시 점점 '맞춤형'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80년이 지난 소설이 다시금 현실에서 재조명을 받는 것은 응당 이유가 있다.

그 이유란 무엇일까? 수 년 간 지속되던 경제 호황이 최근 들어 위태롭게 기우뚱하는 모습이다. 작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 갑작스런 위기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글로벌 경제 흐름을 지배하고, 모두가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낙관론에 젖어 있던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현재의 위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몫이다. 임금은 줄어들고, 고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으며, 경제 회복에 밀려 노동자의 복지는 뒤로 미뤄졌다. 경제가 힘들수록 더욱 고통스러운 건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만 지나가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 과연 그럴 것인가? 그 희망은 누가 만들어 준 희망인가? 1929년과 2009년 80년의 시간이 지났다. 많은 모습이 변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변함이 없다. 노동자들의 슬픔은 그대로이다. <게공선>을 사람들이 다시 손에 든 이유는 여전히 우리가 그 슬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S.1
일본에서의 엄청난 인기 때문인지 벌써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포스트맨블루스>의 사부(히로유키 다나카)가 감독하고, <집오리 들오리의 코인로커>의 마츠다 류헤이가 주연을 맡는다. 과연 영화도 책 만큼의 반향이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P.S.2
<게공선>의 저자 고바야시 다키지는 지하운동을 전개하던 중 경찰 고문에 의해 1933년 요절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