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2007)
알 수 없는 사용자2009. 5. 16. 07:29
영화가 시작되면 한 부부가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행복해 보이지만 그들은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나 브라질의 리오로 떠나고 싶어한다. 그들의 희망이 얼마되지 않아 산산조각 날 것을 예고하듯이 영화는 '당신은 30분 간 천국에 있을지 모른다, 악마가 당신의 죽음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May you be in heaven half an hour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라는 제목을 제시한다. 이후 영화는 평화로운 외곽의 상점에서 벌어지는 범죄극을 보여준다. 보석상의 늙은 여주인을 협박해 보석을 훔치려던 도둑이 방심한 나머지 오히려 총을 맞아 쓰러지게 된다. 이 광경을 목격하던 공범은 서둘러 차를 타고 현장을 빠져 나온다. 당황한 목소리로 현장을 빠져 나온 범인의 모습을 보여주던 영화는 플래쉬백을 통해 인물들의 몇 일전 행각을 보여주는 특징을 보인다.
행크와 앤디 그리고 찰스라는 세 인물의 몇 일전 모습을 차례대로 보여주면서 영화는 절도극을 둘러싼 세 인물의 사연을 드러낸다. 먼저 행크의 몇일 전 모습을 통해 영화는 그가 왜 범죄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행크는 이혼 후 자신의 딸의 아버지 역할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그녀를 위한 양육비를 대기에 그는 너무나 무능하다. 전처의 집을 찾아가 양육비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두 인물 사이엔 더 이상의 애정과 감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마치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같이 돈으로 얽혀있는 사이처럼 느껴진다. 한편 앤디는 겉보기엔 아무 문제 없는 화이트 칼라 사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 보여지는 그의 행각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외나무 다리 위의 존재와 같다. 몇일 후면 세무조사가 있을 거라는 중역의 말에 앤디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회사 안에서 코카인을 흡입하고 비밀 아지트에서 마약 주사를 맞는 그의 모습은 겉모습과 달리 현실의 불안을 견디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내면을 잘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크와 앤디, 그리고 피해자인 나넷과 찰스 사이에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한 가족이라는 점이다. 행크와 앤디는 돈이 궁한 나머지 자신의 부모가 운영하는 보석상을 털려고 모의하게 된 것이다. 앤디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보석상에 특별한 감시 카메라도 없으며 어리숙한 노인네가 홀로 보석상을 지키고 있으니 겁만 준다면 손쉽게 보석을 챙길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앤디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기면서 실패하게 된다. 범행 당일날 보석상을 운영하기로 되어 있던 직원 대신 그의 어머니가 대신 가게를 나오고 행크의 동료가 겁도 없이 총을 들고 오면서 그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하게 된다. 범죄를 통해 돈을 해결하려던 두 형제는 이제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파멸을 초래하게 된다.
영화는 각 인물의 관점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지옥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그려낸다. 범죄가 실패한 후 행크는 서둘러 자동차의 지문들을 닦아냄으로써 자신의 자취를 지우려 한다. 하지만 곧이어 현실적인 문제들이 행크를 덮쳐오기 시작한다. 행크의 딸은 자신의 여행비를 지급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갚으라는 식으로 돈을 요구해대며, 보석 상점을 털려다 살해당한 바비의 아내와 그의 오빠는 행크를 찾아가 위로비를 주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한다. 자신 앞에 다가온 절박한 문제들을 마주한 행크는 앤디에게 전화를 걸어 절실한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앤디 역시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회사는 앤디의 회계장부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한다. 자신의 계획으로 인해 어머니를 죽게 만든 내면의 갈등과 점점 조여오는 회사 간부의 요청은 그를 나락으로 빠뜨린다. 약속도 없이 마약 주사를 놓는 아지트를 찾아가는 그의 몸부림은 앤디의 절박한 심정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마이크 리의 '비밀과 거짓말' 속의 가족 구성원들이 호르텐스란 여인을 계기로 서로 갖고 있던 오해와 증오를 해소한 것처럼 '악마가...' 속의 인물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고민을 고백하고 분출함으로써 그들 각자가 갖고 있는 앙금과 증오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장례식 후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고백과 아이같은 동생인 행크에게 사랑을 베풀고 장남인 자신에게 홀대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분출하는 앤디의 모습은 일말의 화해의 가능성을 조금씩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지만 앤디와 그의 아버지인 찰스는 갈등의 폭발 후 화해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행크와 앤디가 갖고 있는 '비밀과 거짓말'이 용서 받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숨기고 있던 각자의 서운한 감정만을 비밀로 갖고 있었다면 그들은 갈등을 폭발한 후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크와 앤디가 갖고 있는 비밀은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급하더라도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자신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행크와 앤디는 단지 돈을 위해 자신의 부모가 운영하는 보석 상점을 털려고 했다. 결국 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두 형제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그들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된 것이다. 그래서 앤디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을 수 없다. 그것은 혈연으로 이어진 아버지조차도 결코 용서하지 못할 존재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결국 행크와 앤디가 의존할 수 있는 존재는 같은 공범인 그들 자신일 뿐이다. 앤디의 아내가 떠나면서 행크와 자신간의 불륜 관계를 털어놓자 앤디는 좌절감을 견디지 못한 체 집 안의 물건들을 쓸어내 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행크의 전화를 받은 앤디는 그의 배신을 비난하기 보단 자신 앞에 다가온 현실적인 문제를 받아들인다.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앤디는 더 이상 거리낌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자신의 비밀 아지트를 찾아가 사람들을 죽이고 비밀 금고에서 돈을 챙겨 간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는 앤디의 모습과 그의 행동에 놀란 나머지 어찌할 줄 모르는 행크의 대비적인 모습은 한계에 다다른 두 인물의 폭발을 잘 드러낸다. 아지트에서 돈을 챙긴 앤디는 행크를 협박하는 덱스를 찾아가 그를 살해한다. 계속되는 범죄의 악순환 속에서 앤디와 행크 간의 숨겨진 갈등은 폭발하게 된다. 행크의 비밀을 알게 된 앤디는 더 이상 그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어린 아기같은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갈등은 예상치 못한 총격으로 인해 파국을 맞이한다. 범인을 쫓던 찰스가 행크를 목격하고 사건 현장에서 진상을 알게 되자 그는 자신의 아들인 앤디가 있는 병실로 찾아간다.
병실에서 아버지를 목격한 앤디는 그제서야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털어 놓는다. 아버지의 용서를 바라며 잘못을 털어놓은 앤디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의 손길을 반갑게 받아 들인다. 하지만 찰스는 앤디가 바라고 있던 자상한 아버지로 그를 맞이하고 있지 않다. 범인에 대한 증오가 폭발 직전에 있는 찰스는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난 후 앤디를 자신의 아들이 아닌 아내를 살해한 용의자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찰스가 선택한 방법은 끔찍하면서도 충격적이다. 베개로 아들의 얼굴을 질식시키면서 상대방을 노려보는 찰스의 표정은 용의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실려 있다. 아들을 살해한 뒤 쓸쓸히 병실을 빠져나가는 장면과 그를 둘러싼 하얀 빛은 드디어 평온을 찾은 한 인물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는 마치 코엔 형제의 '파고'나 샘 레이미의 '심플 플랜'처럼 돈을 위해서 자신의 가족 관계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그 완벽해 보이던 범죄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서서히 파멸을 초래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범죄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드니 루멧의 영화는 범죄의 과정을 세밀히 묘사하면서 서서히 다가오는 파국을 전개하기 보다는 범죄의 과정을 간단히 처리한 뒤 그 뒤 벌어지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에단 호크 그리고 알버트 피니라는 훌륭한 배우들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신선해 보이는 플래쉬백 형식의 구성을 취하면서도 스피드한 전개로 이야기를 이끌지 않고 서서히 다가오는 현실적인 압박으로 인해 자멸을 초래하는 인간들의 내면을 세밀히 묘사한 시드니 루멧의 연출 방식은 이 영화를 가벼운 범죄 영화로 취급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감정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