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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시간을 거슬러 흘러가는 예측불허의 악몽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를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놉시스도 읽지 않고, 예고편도 보지 않고, 바로 극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영화 소개나 예고편에는 내용 상의 중요한 스포일러들이 들어있는데, 이 복잡한 스릴러물을 제대로 즐기고자 한다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형제가 보석상을 턴다"는 정도의 아주 최소한의 줄거리 정보만을 가지고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래 리뷰에는 영화 내용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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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행히도 내용을 전혀 모른 채로 영화를 관람했는데, 플래쉬백 기법으로 전개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사건의 내막을 알려주는 시드니 루멧의 편집 방식이 얼마나 영리하게 긴장감을 고조시키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사건을 여러 시점에서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조금씩 정보를 노출시키는 이러한 방식은 특히 서스펜스 스릴러 물에서 관객을 시종일관 긴장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트릭이 된다. 전혀 다른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에서도 관객들을 조마조마하게 하고, 미궁에 빠뜨리는 주요 요소는 진실의 내막을 조금씩, 그리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어 가는 데 있었던 것처럼.

처음에는 평범해 보이던 한 가족 안에 가려져 있던 갈등, 그리고 각자가 지니고 있던 상처들은 작은 사건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가면서, 팽창되고 확대되다가 결국에는 폭발하여,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비극적 가족사는 한 가족 내부의 내재적인 문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현재 미국 사회의 경제적 위기를 드러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아주 부유하지는 않지만 성실하게 안정된 생활을 꾸려온 아버지 - 노년 세대와 회계 비리를 저지르며 재정 위기를 초래한, 그리하여 마치 미국의 금융 위기를 불러온 듯한 형 - 중장년 세대, 그리고, 대학 학자금 대출과 양육비, 각종 융자금 등으로 버거운 부채에 시달리는 동생 - 젊은 세대들로 이루어진 미국 말이다. 보험 회사에게 기대어 미국 중산층의 경제 위기를 벗어나려 했던 형제의 무리한 시도는 영화에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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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생, 그러니까 80대 중반 노인이 된 시드니 루멧이 이토록 파워풀한 연출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는 말 밖에 안 나온다. 물론 그는 데뷔작인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설득력 있게 플롯을 끌고 나가는 놀라운 연출을 보여준 바 있으며, 이후 몇몇 대표작들을 통해 사회적 비판의 시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사회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자기만의 영역을 확고히 만들어 왔다. 뿐만 아니라 국내 영화팬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던 리버 피닉스 주연의 <허공에의 질주>에서는 따스한 감성을 자극하기도 했으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과 같은 흥미로운 추리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작품은 탐정 포와로 역할을 맡았던 배우 알버트 피니와의 재회이기도 하다.) 80세를 바라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보고 놀랐던 게 바로 얼마 전인데, 80대 중반이라니. 정말 멋진 할아버지들이다.

물론 영화의 힘을 더해주는 데에는 배우들의 역할도 컸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단 호크, 알버트 피니, 마리사 토메이, 로즈마리 해리스 등의 초호화 캐스팅에 빛나는 불꽃 튀는 연기 앙상블은 영화의 진지함과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으며, 코엔 형제 영화의 음악들을 주로 담당해온 카터 버웰의 사운드트랙도 강약을 오가면서 영화의 긴장감을 지속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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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본주의의 붕괴를 반영하는 듯한 이 영화와 함께 기획된 기획전 <미국 5부작: 다크 사이드 오브 아메리카>는 "미국 사회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거장들의 심포니"라는 부제를 가지고, 미국의 어두운 초상을 그려낸 네 편의 영화를 씨네큐브에서 함께 상영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폭력의 역사>, <굿나잇 앤 굿럭>, <이지 라이더>가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와 함께 상영되는데, 애초에 상영작에 함께 포함하고자 했던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필름 수급 문제로 아쉽게 제외되었다.

매우 강렬한 제목인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May you be in heaven a half hour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라는 아일랜드 속담에서 따 왔다고 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30분 전에 천국으로 가 있기를" 이라는 말은, 사소한 범죄를 계획했다가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는 형제에게 건네는 별 가망없는 위안처럼 보인다. 인생이라는 것이 의도한 것과 얼마나 어긋나버릴 수 있는지 상상하다 보면, 최근에 왠지 세상을 통달한 것만 같은 우디 알렌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난다. "If you want to make God laugh, tell him about your pl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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