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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내 어머니의 모진 끝 <마더>


박찬욱의 영화 <박쥐>가 서슬 퍼런 형광등 아래, 새하얀 병원의 시트, 그 위에 누군가 왈칵하니 토해놓은 듯한 선홍색 핏자욱 같았다면 봉준호의 <마더>는 찌부둥한 청회색 하늘 아래, 누렇게 변색한 풀밭 위를 어디까지 번질지 모르게 타고 있는 검붉은 화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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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건조하게 <마더>는 끝까지 간다. 한국 영화의 두 거장이 선보인 신작들은 놀라울 정로로 닮아 있다. 두 작품 모두 과잉이고, 자의식에 넘치며 불편하고 아름답다. 감동은 없되 놀라울 정도의 감격이 담겨있고 정서는 메말랐지만 표현은 압도적으로 풍부하다.
<박쥐>가 내달리는 상황에 남겨진 인간의 욕망에 관한 지옥도 였다면, <마더>는 관계의 긴장과 조울이 만들어낸 섬짓한 연옥도이다. 한 쪽 손을 들어주자면 개인적으로는 <박쥐>의 용감무쌍한 화려함에 조금 더 팔이 올라가지만 심장을 쥐어짜게 했던 <마더>의 잔상이 더 오래 지속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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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컸던 만큼 만족도가 높았고, 그랬던 만큼 아쉬운 작품이다.
정확히 <박쥐>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만한 <마더>는 한국 영화가 얼마나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한 때 날렸던 홍경표 감독의 촬영은 비루한 모든 '색'을 나꿔챈다.
원빈과 김혜자를 풀샷으로 잡은 골목길 담벼락 노상방뇨 장면에서 마치 도자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청회색은 자줏빛 김혜자의 의상과 묘하게 불안한 기운을 드리운다. 찌뿌둥한 하늘의 한 자락을 옮겨놓은 듯한 원빈의 점퍼와 회색 바지 역시 놀라울 정도의 미쟝센을 만들어낸다. 비단 이 장면 뿐만이 아니다. 영화사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될 놀라운 오프닝과 엔딩에서도 마치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회화적인 화면이 보여지는데 매우 아름답고 서글프며, 기괴하고 인상적이다. 홍경표의 화면은 <박쥐>의 무국적 공간에 이어 시대를 알 수 없는, 공간을 짐작할 수 없는 류성희 미술감독의 치밀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놀라울 정도의 시너지를 발휘한다. 흠잡을 데 없는 성실한 완성도다.
여기에 이병우 음악 감독의 매혹적인 선율이 아주 간헐적으로, 민요처럼 구성지게, 에밀 쿠스트리차 영화의 리듬처럼 신비롭게 화면을 감싸고 돈다.
무당의 광기와 집시의 신비로움이 공존하는 <마더>의 오케스트라는 그렇게 신비롭고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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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 영화의 '표정'을 결정짓는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된 클로즈 업 씬들은 김혜자의 얼굴, 그 예민하고 작은 굴곡들을 천천히 되새김한다. 이마에서 코로, 입에서 턱으로, 목에서 손 끝으로 이어지는 곤충학자 같은 봉준호의 시선은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김혜자의 혼절과 분노를 놓치지 않는다.
텔레비전 드라마 속, 할머니 같지 않은 청순한 실루엣으로 '어머니'를 연기했던 김혜자는
봉준호의 시선에 포획되거나 혹은 뛰쳐 나가며 야수같이 생생한 표정으로 영화를 지탱한다.
그녀는 이 영화 속에서 '어머니'가 아닌 '세상의 모든 엄마' 혹은 '엄마 라는 타이틀의 인간'을 신들린 듯 표현한다.
특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돌연 짐승처럼 포효하는 분향소에서의
연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다. 엑스트라로 화면에 잡히는 작은 소녀의 까만 스타킹과
페티코트 같은 치마 너머로, 완벽하게 조율된 화면 속에서 김혜자는 맹렬하게 움직인다.
천진한 눈과 매서운 입꼬리. 그녀의 이목구비가 뒤틀릴 때 <마더>는 가장 풍부하게
이야기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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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 역시 적역이다. 이상하게도 시골 총각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이 도회적 꽃미남 배우는
<우리 형>때보다 더 어려졌다. 단순히 어려진 게 아니라 '애'가 되었다.
바보도 아니고 멍청이도 아닌 그저 '도준'으로 '기능'하는 원빈은 타고난 리듬감에
테크닉을 더했다. 단독으로 등장하는 씬보다 김혜자 혹은 진구와 함께하는 장면에서
그는 더욱 돋보이는데 특히 교도소 장면에서의 눈빛 연기는 연기자 원빈의 생명력이
아주 오래 지속될 것임을 입증하는 명연기다. <오픈 유어 아이즈>의 반인반수처럼
지독한 현재와 끔찍한 과거를 그는 고운 얼굴 위에 천천히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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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치를 만족시키거나 뛰어넘는 김혜자와 원빈 사이에서 진구는 생생한 날것,
수컷, 잡것의 에너지를 흩뿌뜨린다. 한 순간도 풀어지지 않고 조여진 이 배우의
단단한 긴장감은 일면 장르 영화의 클리셰를 필요로 하는<마더>의 어떤 부분들에서
싱싱하게 꿈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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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놀라울 정도록 균형감각을 갖춘 연출자이자 작가이다.
배우를 디렉팅하는 면에서 그는 박찬욱보다 훨씬 꼼꼼하며 절제되어 있다.
점점 더 자신의 취향을 와이드 릴리즈 하는 박찬욱에 비래 봉준호는 깊게
침잠해 우물을 판다. 아주 어둡고 흥미로운, 마치 어떤 생명체가 서식하는
듯한 , 얕은 박동이 들릴 듯한 그런 우물. <마더>는 <플란더스의 개>의
비루한 유쾌함도, <살인의 추억>의 날렵한 속도감도 <괴물>의 매력적인
캐릭터도 갖추지 못했다. 모든 캐릭터는 조울증 환자들이며 이야기는 종종
늘어지고 사회를 향한 예리한 통각은 그저 토속적일 뿐 짐작할 수 없는
마을에 놓인 휴머니즘-호러 장르인 이 작품에선 자주 방향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준호를 여전히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도
매우 명확하다.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드문 리얼리스트인 그는
이 작품에서 집요할 정도로 '관계'의 파장에 집중한다.
영화적 감동이 없는 이유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성난 엄마와 바보 아들의
애틋함보다는 스스로 모성 신화를 복원하려는 한 중년 여성의 집착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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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는 모든 개개인의 욕망을 헤짚는다. 등장 인물 모두는 도덕적인
동시에 부조리하고 개연성을 갖춘 동시에 감정적이다.
그들은 쉬이 반성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돌아보거나 기다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어떤 암묵적 관계의 약속이 만들어내는
소리없는 긴장은 무엇보다 불안하다. 이 작품의 고전 영화같은
우아함을 갖추었다면 그것은 영화의 형식보다는 봉준호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고 해야 맞을 듯 하다.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는 건조한 눈가는 촉촉해지지 않고
벌개진 상태로 인물들의 뒤안을 따라간다.
이 압도적인 희비극은 어떤 면에서는 신화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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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 기대했던 어떤 것은 모두 예고편 속에 있다.
낚였다는 말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예고편은 핵심적인 반면
배반적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극점의 얼굴을 클라이맥스로
결코 놔두지 않는 봉준호는 분노 뒤의 서글픔과 환희 뒤의
절망을 또렷이 공개한다.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내 어머니의 모진 끝'을 보여주는 <마더>는 충분히 불편할 수
있는 영화다. 일견 판타지에 가까웠던 <박쥐>의 불편함과는
또 다른, 더 강도 높은 찝찝함이기도 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나 히치콕을 언급하는 외신도 있었지만
봉준호는 여전히 봉준호다. 마치 박찬욱이 그러했던 것처럼,
홍상수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다만 나는 그에게서 조금의 습도를 느끼고 싶다.
재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바스락 거리는 이 걸작 앞에서
뇌와 심장은 세차게 박동했으나 끝내 먹먹하던 마음을
위무받지는 못했다. 미련일까 욕심일까. 내게 <마더>는
'명품'임에는 분명하나 갖고 싶지 않은 영화다.
그게 이 영화를 깎아내릴 수는 절대로,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