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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마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던 비극이 드러낸 차디찬 세상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비가 온 뒤인데도 이상하게 건조한 바람에는 모래마저 섞여있는 기분이었고, 나무를 송두리째 뽑을 듯한 매서운 바람은 몸을 한껏 웅크리게 만들었다. 영화도 추웠고 밤공기도 너무 추웠다. 생각해보니 원래 봉준호의 영화는 따뜻했던 적이 없다. 주인공에 공감은 할지언정 주인공을 동정하기는 쉽지 않으며, 감상에 젖게 하거나 감동을 조성하려고 시도하는 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쓰렸다. 다들 김혜자와 원빈과 모성애를 이야기하지만 소녀가장 아정이가 너무 불쌍해서 마음이 아려왔다. 쌀이 그득한 쌀독이 그렇게 잔인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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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 <괴물>로 이어지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마더>와 함께 일관되게 흐르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단단하게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의 재능과, 디테일이 살아 숨쉬는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들을 이야기 속에 완벽하게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언제나 틈새를 놓치지 않고 등장하는 봉준호 특유의 유머와 위트는 우리를 키득거리게 만들지만 결코 억지스러운 설정이나 연기가 아니라 인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웃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장면은 더 코믹해진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서 결국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의 치부를 징그럽게 드러내고, 현실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괴물>에서 무능한 공권력을 풍자하면서 믿을 건 가족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던 그는 <마더>에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이외에는 아무런 보호막을 갖지 못한 아들을 통해서 비정한 한국 사회의 실상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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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스포일러 많음.)

경제력이 있을리 만무한 아들(원빈)과 함께 근근이 살림을 이어나가는 엄마(김혜자)는 백만원 가량의 합의금을 마련하는 것조차 빠듯하다. 한때 아들과 동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힘겹게 살아왔을 것이 충분히 짐작되는 궁핍한 현실이다. 각자가 먹고 살기 바쁜 가난한 동네의 점점 더 삭막해져 가는 인심은 치매걸린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소녀를 차갑게 외면하고, 뒤늦게 드러나는 소녀의 비밀은 점점 더 잔인해져 가는 현대 사회의 나락을 보여준다. 생계를 볼모로 하는 무자비한 성적 착취는 연령대를 더 낮춰가면서 광범위하게 그리고 죄책감없이 퍼져가고, 자기 가족을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 속에서 약자들, 특히 가족의 해체로 인해 버려진 약자들은 무섭게 방치된다.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에 가까운 비극적 사건은 숨겨진 개인들의 상처를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내기 시작하고, 자신 혹은 자기 가족을 방어하기에도 버거운 약자들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속에서 가끔씩 예측가능한 순간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추리물이나 스릴러물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사회의 추함과 비정함을 자연스럽게, 동시에 섬찟하게 드러내고 싶은 듯 하다. 그리고 그가 혐오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회의 기득권층 - 교수, 변호사, 검사, 의사 - 에 대한 냉소도 여전히 양념처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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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먹고 살기 바쁜, 남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각박하고 절박한 세상에서 봉준호의 휴머니즘이 잠시 드러나는 먹먹한 순간도 물론 존재한다. <살인의 추억>에서의 송강호의 명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마더>에서 김혜자가 묻는 "부모님은 계시냐." 라는 대사로 전이되어 마음을 짓누른다. 내 자식이 우선이기는 하지만, 의지할 데 없어 보이는 가엾은 용의자가 한없이 안쓰러운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도덕이나 윤리보다도 몇단계 위에 존재하는 모성애는 결국 그렇게 고통스럽게 어머니를 버티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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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지독하게 강하다. <체인질링>에서 부당한 경찰에 맞서 홀로 유괴 사건을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하던 안젤리나 졸리는 김혜자에 비하면 마냥 가냘퍼 보일 정도이다. 어머니들의 지독한 사랑, 어쩌면 사랑보다는 집착으로 보이기도 하는 지나친 애정이 자식들을 엇나가게, 그래서 사회를 엇나가게 하는 부작용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거부감도 많은 편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그래서 사회의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아들이 어디서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어머니의 애착을 어떻게 비난하겠는가.

자기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모든 것을 아들에게 바치는 어머니를 온몸으로 표현해낸 김혜자는 이미 연기라는 것을 넘어선 어떤 경지에 도달한 듯 하다. 순진무구하지만 가끔씩 숨겨진 어둠을 드러내는 원빈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었다. 최고의 스탭들이 참여한 촬영, 미술, 음악도 영화의 색깔을 명확하게 만드는 훌륭한 팀웍을 보여주었으며, <미스 홍당무>의 각본에 참여했던 박은교가 봉준호 감독과 함께 작업했다는 것도 흥미로왔다. <마더>는 철저히 봉준호다운 작품이지만, 전작들과 비교한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하나의 주제에 엄청나게 집중하여 깊게 파고든 느낌이다. 봉준호의 차기 프로젝트인 <설국열차>는 원작 만화를 재미있게 읽었기에, 꽤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