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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마더] 모성, 그 신성함을 짓밟다


마더
봉준호 감독, 2009년

장르의 배반, 변함없는 봉준호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매혹이다. <마더>는 극장 밖을 나서자마자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다. 126분의 러닝타임동안 단 한 번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한 장면, 한 장면에서 엿보이는 완벽에 가까운 연출은 경탄스러울 정도다. 이 정도면 봉준호 감독에 대한 기대치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신기한 것은 <마더>는 <괴물>처럼 화려한 볼거리를 내세우지도, <살인의 추억>처럼 미스터리를 드러내보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과 닮아 보이지만, 여러 플롯들이 얽혀 들어갔던 <살인의 추억>과 달리 <마더>는 단선적인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전작들에 비해 줄어든 주요 인물들, 그리고 한 길만 파고드는 이야기의 흐름은 오히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더>를 봉준호 감독의 영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장르 안에서 봉준호 나름의 작가 의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봉준호 영화는 장르의 법칙을 따르는 듯 하면서 은근슬쩍 그 법칙을 배반하는 데에 매력이 있다. 사실상 <살인의 추억>도 스릴러를 빌려 80년대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하던 영화와 다름없었고, 괴수물의 외양을 띈 <괴물>에서도 정작 봉준호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괴물과 맞서 싸우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앞장세운 바 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역시 코미디라는 장르를 빌려 아파트로 대변되는 도시인들의 단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봉준호는 언제나 장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들을 담아내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살인의 추억>처럼 스릴러를 빌려온 <마더>를 통해 봉준호 감독이 건드리고 있는 것은 제목에서도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바로 모성이다.


영화는 멀리서 들판을 걸어오는 김혜자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스크린에 그녀의 전신이 잡히는 순간,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그녀의 기묘한 춤사위가 펼쳐진다. 하지만 춤을 추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무언가 회한에 젖은 듯 수심이 가득하다. <마더>는 그 표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앞으로 두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할 이야기의 방향을 짐작케 한다. 오로지 김혜자에게만 집중할 것임을, 그녀의 표정과 감정 변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임을 말이다. (그리고 이 오프닝 시퀀스는 후반부에 가서 그대로 변주된다.)

<마더>는 사건보다는 인물에 중심이 놓인 영화다. 그렇기에 영화의 초반부는 김혜자가 맡은 마더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작두에 손이 베여 피가 나는데도 다친 아들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은 핸드 헬드로 긴박하게 잡힌 영상과 함께 아들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봉준호 감독은 시간이 지날수록 느리지만 여유로운 태도로 <마더>의 초점을 인물에서 사건으로 조심스레 가져다 놓는다. 관객 또한 그러한 변화에 따라 자연스레 영화가 늘어놓는 단서들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향해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그 단서들은 곧 주인공과 관객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만다. 그 배신의 끝에서 봉준호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모성은 어떤 방향으로 표출될 것이냐는 질문을 내던진다. 아들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엄마와 정신이 이상한 아들은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모성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극단적인 설정에 가깝다. 또한 영화는 이 모성을 엄마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심성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극대화된 것으로 그려낸다.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의 충격보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 단순히 사건의 실체만을 뒤집을 뿐 아니라 모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 역시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마더>는 봉준호 감독이 처음으로 18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은 만큼 성적인 코드가 다분히 엿보인다. 영화 초반부터 도준(원빈)과 진태(진구)가 나누는 대화에서부터 드러나는 성적 암시는 도준과 김혜자, 김혜자와 진태의 모종의 관계를 통해 더욱 짙어지며, 살인 사건 중심에 놓인 여고생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에 절정을 향한다. 모성만큼이나 성욕 역시 <마더>에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영화 속에 존재하는 두 가지 사건은 각각 성욕과 모성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인물들의 마음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본능적인 욕망의 과도한 표출이 일으킨 살인이다. 이를 통해 <마더>는 모성에서 신성함을 벗겨버리고 성욕이 지닌 본능적 욕망이라는 겉옷을 입혀 세운다. 모성과 성욕을 같은 자리에 두기, 이것이 바로 <마더>가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또 다른 지점이다. 모성 역시 사실은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보다는 <마더>는 놀랍도록 완벽하다. 화려한 편집과 다채로운 특수효과로 긴장감을 자아내는 기존 상업영화와 달리, <마더>는 순수히 영화적 기법에 의존한 채 126분 동안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아나몰픽 렌즈를 완벽하게 활용한 쇼트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완벽하게 장악하며, 쇼트와 쇼트, 신과 신의 결합 역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마더>는 영화적으로 순수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장르를 빌렸지만 장르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주제를 펼쳐 보이는 연출력도 변함이 없다. 봉준호는 여전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감독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면모를 보이는 모습에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