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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보트] 더 이상 소년들은 울지 않는다


보트 (No Boy, No Cry)
김영남 감독, 2009년

장르영화와 청춘의 아슬아슬한 조합

바다 위에 유유히 떠있는 보트. 세상 모든 일이 다 무료한 듯한 청년이 노곤히 잠들어 있다. 작은 보트에 의지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물건을 밀수하는 일이 일상의 전부인 형구(하정우)는 변변치 않은 삶이라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소년과도 같은 인물이다. 형구가 일본에 갈 때마다 그를 맞이하는 토오루(츠마부키 사토시)는 형구와 달리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돈에 목숨을 거는 토오루는 그러나 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순진함을 지녔다는 점에서 형구처럼 소년의 모습을 간직한 인물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일상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산산조각 난다. 우연한 계기로 형구는 자신이 운반해온 물건이 마약이었음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혼란을 수습할 틈도 없이 형구는 마약보다 더 어마어마한 ‘밀수’를 명령받게 된다. 납치된 여자를 일본까지 옮기게 된 것. 그러나 납치된 여자 지수(차수연)는 오히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면 형구와 토오루에게 5천만 엔씩을 주겠다는 당돌한 제안을 한다.


여기까지의 시놉시스만 놓고 보면 <보트>는 마약 밀수와 납치, 거액의 돈 등 범죄영화에 나올 법한 소재로 가득하다. 하지만 <보트>에서 이 모든 것들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보트>는 시작부터 장르영화적 설정들을 한껏 펼쳐놓지만, 이는 단지 두 주인공 형구와 토오루 사이의 모종의 관계를 엮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뿐 장르적인 쾌감으로는 발전되지 않는다. <보트>는 장르영화의 틀을 빌려 청춘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아우르려는 야심을 지닌 영화다. 영화는 느린 호흡으로 장르의 법칙을 거스르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카메라는 조용히 인물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처한 고민, 그 속에 내재된 생각과 감정들을 최대한 관객에게 전하려고 온갖 힘을 쏟는다.

거액의 돈을 제안 받은 뒤에도 형구와 토오루는 그들의 계획을 신속하게 진행시키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형구와 그렇지 못한 토오루는 여러 모로 상반된 인물이지만, 영화는 상반된 모습만큼이나 비슷한 면모가 둘 사이에 존재함을 넌지시 드러낸다. 그 중심에 놓인 것이 바로 가족이다. 어릴 적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형구와 가족들이 자신의 삶을 갉아 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토오루가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가족으로부터 입은 상처로 인해 그들의 성장이 멈춰 있기 때문이다. 몸뚱이 하나만으로 가득 차는 작은 보트의 크기에 불과한 그들의 삶은 그래서 쓸쓸하기 그지없다. <보트>가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온갖 범죄영화적인 소재들이지만, <보트>가 정작 관심을 쏟는 것은 두 인물의 삶, 그 기저에 자리 잡은 고독이다. 형구와 토오루가 지닌 고독의 크기만큼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고독은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형구와 토오루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둘이 같이 부르는 노래는 아시아의 화합을 이야기하는 ‘아시아의 순진’. 제목만큼이나 희망적인 노래를 서로 부둥켜안고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고독도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보트>는 정점에 오른 뒤에도 이야기를 바로 마무리 짓지 않고 진짜 결말을 향해 달려 나간다. 장르영화로 시작을 한 이상 영화의 마무리 역시 장르영화의 법칙을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보트>는 태생적으로 두 가지 질문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데뷔작 <내 청춘에게 고함>에서 청춘의 이야기를 극히 사실적인 연출로 그려냈던 김영남 감독과 장르영화와의 만남이 조화를 이루는가, 이며 또 다른 하나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와 같은 감성적인 영화를 만든 와타나베 아야의 각본이 김영남 감독의 연출과 적절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이다. 영화를 통해 유추하게 되는 질문의 대답은 안타깝게도 부정적이다. 장르적인 장면보다는 여전히 일상과 삶을 이야기하는 순간에 김영남 감독의 연출은 빛을 발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연출과 일본영화 특유의 소소한 감성이 그다지 조화롭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석연치 않은 조합이 <보트>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영화는 선뜻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결국 소년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벽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만다. 보이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들리는 것은 희망적인 영화의 엔딩은 이야기를 확실히 결론짓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모양새다. 끝내 소년들은 눈물을 흘리고 만다. 하지만 그들 가슴 속에 그들이 부둥켜안고 노래 부르던 순간만큼은 깊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깊이만큼 그들 역시 조금 더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했음 또한 틀림없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