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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나의 아저씨 (Mon Oncle, 1958)

'나의 아저씨'의 초반부 장면은 개들의 움직임을 통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가지 세계의 모습을 정감있게 보여준다. 마치 20세기 이전의 옛스러운 풍경을 연상시키는 건물들 사이로 개들이 등장하는데, 무리를 지어 어딘가를 향해 달려나가는 모습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후 개들은 낡아 허물어진 벽을 넘어 현대적으로 지어진 도로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이후 무리들 중 한 마리의 개가 현대식으로 지어진 단독 주택의 철문 사이로 들어가면서 이 곳에 살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단독 주택의 주인인 아르펠 부인의 모습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인 아르펠이 자동차를 준비하고 그의 아들과 함께 출근을 할 때까지 여인은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수건으로 먼지를 닦아낸다. 이후 영화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움직임을 통해 지나칠 정도로 규칙적인 현대 사회의 모습을 풍자한다. 마치 수평으로 자를 댄 것 처럼 3차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규칙적인 움직임과 공장에 들어선 아르펠의 차가 개인 주차장에 정확하게 주차하는 과정은 마치 짜여진 규칙대로 움직이는 산업화 사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하다.



한편 영화는 개들과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마차의 움직임을 통해 허물어진 벽 너머에 있는 옛스러운 시골의 세계를 등장시킨다. 차들의 규칙적인 움직임들로만 이루어지던 도시와 달리 시골 마을은 사람들의 움직임들로 시끌벅적하다. 거리의 노점상들과 손님들이 모인 시골의 모습은 도시의 풍경에 비해 활기차고 인간미가 느껴진다. 이후 영화의 주인공인 윌로 씨가 등장하는데, 그가 물건들을 구매한 뒤 자신이 사는 허름한 복합 주택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고정된 쇼트를 통해 윌로 씨가 자신이 사는 집을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복잡하게 이어진 통로를 여유롭게 걸어가는 윌로 씨의 걸음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현대적인 단독 주택에 사는 아르페 가족과 허름한 복합 주택에 사는 윌로 씨를 연결하는 접점은 아르페 부부의 아들이다. 아침에 차를 통해 아르페가 자신의 아들을 학교로 데려다 주었다면, 윌로 씨는 허물어진 벽을 넘어 도시를 찾아가 학교를 마친 자신의 조카를 집으로 데려다준다. 아이는 하교길에 자신의 또래들과 함께 장난을 치며 어른들을 골탕 먹이지만 착한 윌로는 아이의 행동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 장난이라도 친듯이 어른들의 눈을 피해 아이와 숨는 모습은 윌로의 착한 심성을 잘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단독 주택에 들어서는 순간 아이의 부모인 아르펠 부부는 윌로를 못마땅한 태도로 받아들인다. 아르펠의 관점에서 윌로는 그저 빈둥거리면서 어린 아이와 함께 돌아다니는 한량같은 존재일 뿐이다. 아르펠 부부의 내면 속에는 자신들보다 가난하고 볼품없는 윌로에 대한 냉대가 자리잡고 있다. 손님이 올 때마다 항상 작동시키는 물고기 모양의 분수를 윌로가 올 때에는 스위치를 켜지 않는 모습이나 함께 식사를 할 때 자신들과 다른 의자를 내오는 모습 등을 통해 윌로 씨에 대한 아르펠 부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아르펠 부부와 달리 그들의 아들은 자신의 외삼촌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는 주택 안에선 항상 시무룩하지만 외삼촌의 자전거를 함께 타며 시골로 갈 땐 웃음이 가득찬 표정을 짓는다. 시골의 친구들과 함께 짖궂은 장난을 치고난 뒤 (우리나라의 불량식품 같은) 잼과 설탕이 듬뿍 담긴 빵을 사먹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집에 돌아온 뒤 철저하게 살균된 도구들을 이용해 먹을 것을 내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시무룩하게 바라보는 아이의 대비된 표정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아르펠은 자신의 아이가 윌로를 따라 다니면서 좋지 않은 모습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윌로를 경계하지만, 아르펠의 아들은 항상 윌로를 따라 다니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에 반해 아르펠은 좀처럼 아들의 환심을 사지 못한다. 퇴근 때마다 최신형 장난감을 사서 아들에게 선물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장난감보다 윌로가 주는 구닥다리 장난감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이처럼 두 어른에 대한 아이의 상반된 태도는 자연히 아르펠의 분노를 사게 만든다. 아르펠은 아이의 사랑을 독차지한 자신의 처남을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인맥을 이용해 윌로를 공장에 취업시키려 하지만 그것조차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윌로 씨의 행동은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악효과만 발생 시킬 뿐이다.

영화는 윌로 씨가 아르펠의 주택에서 겪는 해프닝들을 통해 새로운 기술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주방에서 컵을 꺼내러던 윌로 씨는 여러 개의 버튼들로 이루어진 기구들을 보며 어찌할줄 모른다. 자동으로 열리는 기구들에 놀라면서도 플라스틱으로 된 그릇을 공처럼 튕기면서 장난을 치는 윌로 씨의 모습이 웃음을 이끌어낸다. 한편 아르펠이 옆 집에 홀로 사는 여인과 윌로를 맺어주기 위해 벌인 파티를 벌이는데, 윌로 씨가 어색한 자리에 끼어들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통해 웃음과 비판의식을 전달한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정원에 나 있는 길의 방향대로 이동하되 길 사이에 있는 돌들을 밟아가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이동경로를 따르는 윌로 씨는 자연히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체 그들에 섞여 꼬이는 상태가 되며 심지어 연못에 있는 동그란 잎파리를 돌로 착각하고 그 곳으로 돌진하는 행동을 보여준다. 항상 정해진 방향과 규칙을 따르는 현대인과 그 속에 얽혀 방황하는 윌로 씨의 모습이 코믹하게 느껴진다.


아르펠 부부에게 윌로 씨는 점점 진화있는 현대의 신기술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 인물처럼 느껴지지만,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것을 보여준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윌로 못지 않은 시행 착오와 비합리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예를 들어 아르펠 부인은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손님에게 과시하기 위해 정원에 있는 물고기 모양의 분수의 스위치를 눌러 작동시킨다. 손님이 집 안에 있을 때에 스위치를 켰다가 손님이 집에서 나온 뒤에는 분수의 작동을 중단 시키는 행동을 반복해서 해대는 부인의 행동은 비생산적으로 느껴진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의 편리함은 고려하지 않은 체 강박적으로 청소를 하고 분수를 작동시키는 부부의 모습은 결국 자신들의 편리함을 위해 기계를 활용하지 않고 그저 부의 과시 수단으로 활용하는 인간들에 대한 조롱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신뢰하는 신기술로 인해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차고에 자동 센서로 작동하는 도어를 장착한 아르펠 부부가 오히려 자동센서로 인해 차고 안에 갇히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아르펠은 윌로를 자신들의 세계에 맞게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윌로는 자신이 사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살아가는 것을 선호할 뿐이다. 어느 날 자신의 집에 늘어져 자고 있는 윌로를 목격한 아르펠은 윌로를 지방으로 내려 보내기로 결심한다. 반강제적으로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게 된 윌로는 저택을 내려가 주변의 이웃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윌로가 아르펠의 차를 타고 지나가는 장면 속에는 낡은 저택들을 허무는 인부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들이 낡은 저택들을 허물고 새로운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윌로 씨도 현대적 가치로 무장된 아르펠에 의해 사라지는 옛날의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크 타티는 윌로 씨의 퇴장을 비극으로 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윌로 씨가 지방으로 떠나가 위해 역으로 사라지자 아르펠은 그를 향해 휘파람을 부르게 되는데, 그 바람에 주변에 지나가던 행인이 가로등에 부딪히게 된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처럼 행인을 골탕먹이게 된 아르펠은 자신의 행동을 본 아이가 웃음을 터트리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버지인 아르페는 아이들의 장난을 통해 아들의 감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후 영화는 첫 장면과 유사하게 거리를 지나다니는 개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은 점점 기술의 진보로 인해 변화되지만 결국 삶의 방식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란 것을 마지막 장면을 통해 함축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