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을 보기 전에 마음 속엔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개봉할 때부터 외국 언론의 찬사를 받고 있어서 픽사가 또 한 번 일을 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작년에 본 '월-E'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과연 '업'이 '월-E' 만큼의 만족감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업'을 보면서 정말 오랫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업' 속에 담겨진 칼의 여정은 고집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런 느낌이 들었다.
'업'의 첫 장면은 한 때 모험을 꿈꾸던 두 아이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모험가인 찰스 먼츠의 뉴스를 들으며 탐험을 꿈꾸던 칼은 자신과 같은 꿈을 가진 소녀인 엘리를 만나게 된다. 파라다이스 폭포에서의 모험을 꿈꾸었던 두 아이는 평생을 함께한 부부로 살아가게 된다. 칼과 엘리가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을 함축한 장면들은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천하려 했던 연인의 사랑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칼과 엘리는 그들의 보금자리인 집을 마치 모험 속 세상처럼 꾸미고 언덕 위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며 밝은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인생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들은 그들의 이상을 점점 현실과 멀어지게 만든다. 두 연인의 결혼부터 노년에 이르는 삶의 과정이 반복되는 장면들이 보여진 후 영화는 홀로 삶을 살아가는 한 노인의 모습을 비춘다.
칼에게 남겨진 것은 엘리의 추억이 담긴 집 한 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집 주위에는 재개발을 위해 건설업자들이 한창 작업을 하고 있다. 엘리의 추억이 담긴 집을 지키기 위해 칼은 자신의 집 주변을 찾아오는 낯선 이들을 경계한다. 한 때 모험과 사랑의 열망으로 미소짓던 조용한 남자였던 칼은 미소를 잃은 고집불통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집을 지키기 위한 칼의 경계심은 뜻밖의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추억이 담긴 우체통을 떼어가려는 직원의 머리를 지팡이로 때려 법정에 선 칼은 반강제적으로 집을 떠나야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양로원으로 끌려가기 하루 전 마지막으로 엘리의 추억이 깃든 집을 바라보던 칼은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운다. 수천 개의 풍선을 통해 처음으로 집을 떠나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풍선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집의 모습은 기상천외하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빌딩 숲 사이로 날아오르는 알록달록한 풍선들, 그리고 마치 비행선처럼 하늘을 나는 집의 모습은 자유로운 상상의 즐거움을 부여한다.
과거의 소중한 추억을 파괴하려는 자들로부터 벗어난 칼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날 무렵, 의문의 노크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진다. 방문을 연 칼은 그제서야 자신의 집 안에 불청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몇 일전 노인 경로 뱃지를 타기 위해 칼의 집을 찾아온 러셀이란 아이가 자신의 집에 함께 있게 된 것이다. 러셀은 아이답게 호기심으로 가득찬 나머지 이것저것을 둘러보며 친근한 말투로 칼에게 대화를 시도하지만 칼에게 러셀은 그저 자신의 모험을 방해하는 수다스러운 아이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호기심있는 물건들은 삼키고 보는 독특한 새인 케빈 그리고 인간의 말을 하는 개인 더그가 모험에 참여하게 되면서 집을 옮기려는 노인의 계획은 예측 불가능한 모험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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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옮기는 여정의 과정 속에서 영화는 소년 탐험단 소속인 러셀과 말하는 강아지인 더그,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새 케빈의 사연을 소개하며 그들 역시 칼처럼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러셀의 행동을 통해 잦은 출장으로 바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며 칼과 러셀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더그 역시 동료인 개들에게 멍청이라 불리며 따돌림 당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둥지가 있는 곳에서 울리는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으려 하는 케빈의 행동을 통해 어린 새들을 보호하려는 어미 새의 모성 본능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칼은 자신 주변에 있는 러셀과 더그 그리고 케빈에게서 동정을 느끼면서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반드시 집을 파라디이스 폭포에 옮겨 놓겠다는 그의 집념이 주변의 존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차단하고 만 것이다.
칼에게 있어 풍선에 매달린 집의 존재는 엘리 그 자체이다. 풍선에 매달린 집을 마치 엘리를 바라보듯이 혼잣말을 하며 친근한 미소를 짓는 칼의 모습은 그가 집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해 집을 끌고가는 칼의 묵묵한 걸음은 자신과 함께 살면서 꿈을 이루지 못한 엘리를 위한 희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생각한다면 집에 대한 칼의 집착은 자신의 삶을 즐거움을 포기하고 과거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행동일지도 모른다. 집을 지키기 위해 칼은 사람들의 왕래를 끊는 방법을 선택하고 홀로 살아간다. 그 결과 그는 어떠한 즐거음도 갖지 못한 체 과거의 추억에 얽매여 사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한 때 혈기 왕성하던 모험가였던 찰스 먼츠가 자신의 모험을 증명할 존재를 찾기 위해 집착한 나머지 비행선에 갇혀 독재자로 군림하며 평생을 살았던 것처럼, 칼 역시 과거의 추억에 얽매인 나머지 자신 옆에 있는 러셀과 더그 그리고 케빈의 어려움을 깨닫지 못한다. 케빈이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집을 지키기 위해 불을 끄는 행동을 선택한 칼의 행동은 어린 아이인 러셀에겐 비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힌 칼은 엘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뒤로 한 체 홀로 여정을 떠난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석양이 내린 대지를 홀로 걸어가는 칼의 걸음걸이는 무겁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결국 집을 파라다이스 폭포 근처에 내려놓는 데 성공한 칼은 집 안을 정돈하고 자리에 앉아 엘리가 적지 못했던 모험책을 훝어보며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비어 있었다고 생각한 모험책 속엔 평생을 함께 한 칼과 엘리의 삶이 담긴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비록 엘리는 자신의 꿈이었던 파라다이스 폭포에 이르지 못했지만 칼과 함께한 평생의 삶이야말로 그녀 인생에 있어 최고의 모험이었음을 책을 통해 남겨둔 것이다. 이제 당신을 위한 모험을 떠나라고 쓴 그녀의 마지막 글을 읽은 칼은 집에 얽매였던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 생존해 있는 소중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찰스 먼츠의 비행선을 향해 뛰어든다. 유쾌하면서도 흥미 넘치는 구출작전의 과정도 인상적이지만 자신의 전부였던 집을 떠나보내는 노인의 모습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하늘을 나는 모험이 끝난 후 영화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 칼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앨리가 달아주던 모험 뱃지를 러셀에게 달아주는 칼의 행동은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건네주는 사랑의 표현처럼 따뜻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칼과 러셀 그리고 더그가 함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낸 모험책을 보여주는 엔딩 크레딧은 보기만 해도 행복한 감정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