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서

멸종 (End of an Era)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를 이동하고 그 결과 미래가 어긋나 버린다는 설정의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는 접했다고 생각했지만 '멸종'이란 소설은 내가 생각하던 세계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이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단순히 몇 백년의 단위가 아닌 무려 6000여만 년전의 백악기 말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6500만 년전의 백악기를 묘사하면서 공룡의 멸종에 대한 색다른 설정을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공룡들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고 있던 소설이 중반부 이후 의문의 존재를 등장시키면서 세계관이 단순히 지구를 넘어 우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 '쥬라기 공원'을 연상시키는 공룡들의 등장, 그리고 우주에서 온 미지의 존재까지 등장하는 '멸종'을 읽으면서 이걸 어떻게 수습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멸종'의 초반부는 6500만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캐나다 과학자인 브랜디와 클릭스가 공룡의 멸종을 앞둔 백악기 말을 탐험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브랜디와 클릭스의 탐험을 통해 공룡의 멸종 원인으로 보고 있는 운석 충돌설이나 주기적 멸종론 등을 깨뜨린다. 또한 현재의 지구보다 중력이 작아 공룡들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다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몸집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챕터별로 진행되는 책의 중간마다 등장하는 '경계층'이란 챕터의 이야기이다. 브랜디와 클릭스가 탐험을 하고 있는 6500만 년전의 세계와 다른 현재의 브랜디의 모습을 등장시키면서 시간여행으로 인해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 여행과 공룡이란 소재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던 저자는 여기에 미지의 존재를 등장시켜 세계관을 확장시킨다. 트로오돈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브랜디와 클릭스는 우연히 공룡 속에서 튀어나온 파란색 잴리 모양의 물체를 발견한다. 브랜디의 몸 속에 들어간 미지의 생물은 다시 공룡 속으로 들어간 뒤 놀랍게도 영어로 그들에게 말을 건다. 영어로 말을 하는 공룡의 등장은 이전까지 읽던 소설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꿔 버린다. 시간 여행을 통해 공룡의 멸종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 같던 책이 이젠 외계인을 등장시켜 황당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버린 것이다.

자신을 헤트라고 소개하는 공룡(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조종하는 젤리모양의 개체)은 브랜디와 클릭스에게 말을 걸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헤트와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화성에서 온 존재임을 깨달은 브랜디와 클릭스는 미지의 존재를 두고 갈등을 일으킨다. 친근한 태도로 접근하는 헤트의 목적이 시간 여행 장치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브랜디는 그들을 경계하지만 헤트를 통해 외계 생명체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클릭스는 헤트를 미래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트를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은 과학적인 견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보다 근본적인 갈등은 클릭스에 대한 브랜디의 증오에서 비롯된다. 한 때 친한 친구였지만 이혼한 아내인 테스를 빼앗아간 클릭스에 대한 증오를 애써 감추고 있는 브랜디의 감정은 두 사람 간의 미묘한 갈등을 조성한다.

귀환을 앞두고 헤트를 미래에 데려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브렌디의 모습은 선택을 해야하는 결정적 순간에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했던 그의 과거를 연상시킨다.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체 그녀와 이별했던 기억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안락사를 바라던 순간 그를 외면하며 시간 여행을 한 과거를 회상하며 괴로워하는 브랜디의 모습을 통해 삶의 순간마다 다가온 중대한 선택을 하지 못한 결과 그를 기다라고 있는 것은 비참한 기억 만이 남아있음을 드러낸다. 행동하지 못한다는 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결단이라고 강조하는 저자의 글처럼 결국 인간의 삶 그리고 더 나아가 시대를 바꾸는 것은 바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