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독] 소박했던, 그러나 끝내 파멸을 부른 욕망


독 (The Pot)

김태곤 감독, 2008년

날카로운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영화

그것은 작은 꿈이었다.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작은 소망이었다. 형국과 영애 부부가 유산을 처분하고 서울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조금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 형국은 새로 시작한 사업이 잘 풀리길 바랐고, 뱃속에 둘째 아이를 가진 영애는 첫째 딸 미애와 함께 소박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독>은 그 비밀로 인해 끝내 희망과 행복을 이루지 못하게 된 한 가족의 가슴 아프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다.


김태곤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독>은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통해 공포를 길어 올리는 영화다. 그러나 공포영화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음에도 정작 <독>은 관객들을 공포에 빠트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 딸 미애의 기이한 행동, 귀신을 연상케 하는 정체불명의 존재 등 공포영화에서 볼 법한 소재들이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지만 이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 대신 <독>이 관심을 쏟는 것은 바로 극 중 인물들의 심리 상태다. <독>이 진정으로 공포스럽다면 그것은 영화가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어가 모두가 외면하고픈 어떤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공포영화인 동시에 스릴러의 외양을 취하고 있는 <독>은 형국과 영애 부부가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서 겪게 되는 일상을 통해 이들 가족의 비밀을 조금씩 드러내는 방식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유도한다. 형국과 영애 부부는 바뀐 생활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웃에 사는 장로 가족을 따라 교회에도 나가고, 많은 돈을 헌금으로 바치며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들 가족의 행복을 잠식해 들어온다. 장로 부부의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만나면서부터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 딸 미애가 바로 그 중심에 놓여 있다. 미애의 행동들에서 형국과 영애는 서울로 오기 위해 그들이 선택해야 했던 어떤 결정을 또 다시 떠올리게 된다. 한 순간의 선택이 나은 죄책감은 그들의 삶을 조금씩 옭매여오며 그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에 조금씩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인 주제까지 공포의 소재로 다루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독>은 <불신지옥>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종교를 다루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가족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여 있으며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묘하게 닮아있다. 그러나 <불신지옥>이 믿음의 문제를 파고들었던 것과 달리 <독>은 믿음마저 사라진 상황 속에서 무너져가는 인간의 심리에 초점을 두며 <불신지옥>의 주제와 그 궤를 달리 한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정면 비판을 교묘하게 피해간 <불신지옥>과 달리 <독>은 잘못된 믿음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통해 기독교를 예리하게 겨냥한다. 영화가 안수 기도를 받는 미애를 찾아낸 형국이 끝내 이성을 잃고 무너져가는 모습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은 비단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보편적인 욕망이 끝내 한 사람을 파멸로 이르게 만드는 과정을 바라보게 된다. 형국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이 얼핏 엿보이는 그 순간이야말로 <독>이 진정 공포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그토록 원했던 희망과 행복을 찾지 못한 영애가 다시 이사를 떠나는 쓸쓸한 모습으로 끝난다. 과연 이들 가족이 꿈꾼 것들은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형국과 영애 가족이 떠나고 텅 빈 아파트를 비출 때, <독>은 앞으로 새로 이사 올 또 다른 가족도 같은 일들을 겪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조악한 특수효과들, 그리고 전반적으로 산만한 편집 등 기술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밟히지만, 그럼에도 인물들의 내면을 날카롭게 묘사하며 저예산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 점은 <독>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 그렇게 <독>은 관객의 가슴에 작지만 무거운 여운을 남긴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