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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나무없는 산 _ 사실적이어서 더욱 아름다운 순간



나무없는 산 (Treeless Mountain, 2008)
사실적이어서 더욱 아름다운 순간


사실 김소영 감독의 작품 <나무없는 산>을 보러 극장으로 가는 내 마음 속에는 기대되는 것과 예상되는 것이 있었다. 한국영화임에도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 유수의 영화제들의 수상내역으로 더 알려진 이 영화의 이야기는, 영화를 다 보고나서 든 생각도 마찬가지였지만 정말 영화나 TV다큐 혹은 뉴스들을 통해 수백번도 더 접한 이야기 그 자체였다.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부모에게 버려지다시피 타인에게 맡겨진 한 자매. 떠나면서 엄마가 남기고 간 돼지 저금통이 가득 찰 때쯤이면 돌아온다는 말에 열심히 동전을 모으는 아이들과, 엄마가 떠난 그 자리에서 엄마가 오기 만을 기다리는 모습. 이렇게만 보면 <나무없는 산>은 '아, 또 눈물, 콧물 짜게 하는 신파 드라마가 한 편 나왔나보다'라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얘기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데 진부하다거나 지루하다거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무없는 산>을 표현하는 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라면 '사실적'이라는 말을 꼽을 수 있을텐데, 언제부턴가 '사실적'이라는 말은 '극적'이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것이 되어버렸지만, 김소영 감독은 이 무서운 현실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과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자연의 순간들로 이 자매의 이야기를 따듯하게 감싸 안고 있다.


ⓒ With Cinema. All rights reserved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 언니인 '진'이의 성장영화라는 점이었다. 고모네 집에서 잘 때, 처음 오줌을 지리고 나서 진이는 동생인 빈이가 그랬던 것처럼 하려고 몰래 자리를 바꾼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빈이를 혼내는 고모를 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빈이도 물론이지만 진이 역시 그냥 '어린 아이'다. 이불에 오줌을 싸고 나면 고모에게 혼날까봐 무섭고, 동생을 돌봐야 한다고 어른들은 말하지만 아직 누군가를 돌본다기 보다는 본인 역시 부모에 돌봄이 더 간절한 나이다. 영화는 이점을 계속 부각하려고 한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진이와 빈이는 아직 어린 아이라는 점을 말이다. 이런 묘사는 나중에 왜 이런 아이들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거로 작용한다.

이렇게 자신이 혼날까봐 잘못을 동생에게 뒤집어 씌우기도 했던 진이는, 고모네 집에서 한참을 지내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고, 결국 고모집을 떠나 할아버지 집으로 가게 되면서 점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재밌게 잡고 놀아도 될 메뚜기 잡기는 저금통에 채워넣을 돈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수단이 되고, 마냥 맛있는걸 먹고 싶고 친구와 놀고 싶어하는 빈이 와는 달리, 주변에 친절한 손길에도 본능적으로 미안함을 갖기도 하고 할머니의 손길도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빈이에 비해 진이가 점점 더 고민을 많이 해야만 하는 상황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왜 어린 아이가 이런 고민을 겪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조용히 묻고 있다. 정말로 영화에서는 진이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장면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클로즈업으로 진이의 얼굴과 눈동자를 비출 때면 저 자그만한 눈, 코, 입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무슨 생각을 할까?'가 정말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나이가 아닌데'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이다.


ⓒ With Cinema. All rights reserved

<나무없는 산>의 템포는 굉장히 느린 편이다. 어쩌면 현실 속 시간 보다도 더 느린 것만 같이 느껴진다. 체육복과 공주복단벌로 초가을부터 겨울까지 겪게 되는 자매의 시간에서는 계절의 흐름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들었던 다른 생각은 감독이 '시간'보다는 '순간'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상의 전개는 매우 극적이지만 한 편으론 언젠가는 끝난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순간'에 집중한다. 아주 짧은 순간들에서 이 자매가 겪고 있는 현실을 문득 문득 느낄 수 있게 되고, 영화 속 마지막 보금자리인 할아버지의 시골마저 어쩌면 영원한 안식처라고 안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특히 할아버지의 식사를 가지고 간 일터 바로 옆에 중장비들을 동원하여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장면은 상당히 상반적인 장면으로서, 어쩌면 이 산과 들이 (따듯한 할머니와 함께 하는 날들이)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영화 속에는 중간중간 장면의 전환시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비추고 있는 컷을 삽입하였는데, 이런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cm>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신카이 마코토가 하늘로 표현하려는 아련한 감성과 정확히 맞지는 않지만, 김소영 감독은 중간중간 삽입한 이 장면들로 인해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 With Cinema. All rights reserved

사실적인 표현을 내세우고 있는 영화답게 극적인 요소를 유도하려는 장치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그 현실에 놓인 진이 빈이의 모습이 안쓰러워서이지, 보통 영화들처럼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도 없다(있다면 진이가 단 한번 폭발하는 그 장면 뿐이리라). 감정을 고조시키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영화적 장치라면 역시 음악을 들 수 있을텐데, 영화는 러닝타임내내 음악을 거의 들려주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보니 음악이 채워야할 공간을 하늘을 담은 장면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엔딩 크래딧에 가서야 노래를 들려주는데, 진이 빈이의 노래로 시작한 이 곡의 원곡은 다름아닌 'Grandaddy'의 'The Nature Anthem'이었다. <나무없는 산>에서 그랜대디를 만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엔딩 크래딧이 흐를 때 상당히 놀랐었는데, 그랜대디의 곡을 아이들에게 번역해서 부르게 했다니 이것 참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겠다.


1. 그리고 보니 계속 아이들이 멀어지고 있네요. 서울에서 지방으로 또 시골로.

2. 감독의 데뷔작 <방황의 날들>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네요.

3. 후반부 할머니가 먹을 것을 주며 진이를 부를 때의 와이드 샷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와'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4. 'Grandaddy'의 'The Nature Anthem' 뮤직비디오. <나무없는 산>덕에 그랜대디를 몇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네요.




5. 정말 얼핏 잘못 생각하면 다큐멘터리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의 연기가 대단합니다. '아, 맞아 연기였지'하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만큼 사실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