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영화 '렛미인'을 뒤늦게 감상했다. 뱀파이어 호러영화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두 아이의 사랑의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진 점이 마음에 든 영화였는데, 영화를 보면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우선 엘리의 보호자처럼 등장하는 호칸이란 남자의 행동이 약간은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왜 그는 엘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면서 피를 수집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읽은 평들이 흥미로웠는데, 영화의 결말을 그렇게 본다면 암울한 장면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영화의 원작이 최근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영화를 보면서 들은 의문점을 풀고자 책을 읽게 되었다.
보통 영화의 원작을 읽으면 그 영화에 대해 실망하거나 혹은 원작에 대해 실망하기 마련인데, '렛미인'의 경우는 영화와 책 모두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렛미인'은 전체적으로 왕따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80년대 스웨덴 사회의 분위기를 보다 반영하고 있으며 영화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인물들의 관계나 에피소드들을 포함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호칸과 엘리의 관계, 엘리의 희생자였던 요케와 비르기니아 그리고 라케의 사연들, 그리고 영화 속에 드러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영화를 감명있게 본 사람이나 영화 속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의 행동 등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다면 원작인 소설을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책 속에 묘사된 오스카르의 삶은 영화 속에 묘사된 그의 모습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욘니와 미케, 토마스는 게임을 하듯이 오스카르를 몰아넣고 그를 돼지처럼 끌고 다니며 괴롭히는 가학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들의 학대가 끝나고 난 뒤 코피를 흘리고 오줌을 흡수하는 오줌공을 들쳐보는 오스카르의 모습은 영화의 주인공보다 더 비참해 보인다. 오스카르는 세 아이에게 당한 분노와 굴욕감을 호소하고 자신의 삶을 구원받고 싶어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는 아무도 없다. 오스카르의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상처받는 모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며 그의 선생님들도 아이의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의 몇 안되는 친구들도 어려움에 처한 소년을 도울만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연약하고 힘없는 자아를 극복하기 위해 소년은 도둑질을 하고 심지어 자신이 악랄한 연쇄살인범이라고 생각하며 칼을 휘두른다. 자신을 끝없이 괴롭히던 세 소년을 향한 오스카르의 분노는 나무를 향해 표출된다. 더없이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살인자에 투영하려는 소년의 몸부림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한편 엘리는 뱀파이어로서의 본능과 인간으로서의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엘리는 누구의 도움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지만 아동 성범죄자로 몰려 사회에서 추방당한 호칸을 이용해 피를 구한다. 엘리는 왜 호칸을 이용하는 번거로운 방법을 쓰면서 피를 얻으려고 했을까. 스스로 사람을 죽여 피를 구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보다는 타락한 어른을 이용하는 것이 그녀에게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칸이 피의 댓가로 그녀의 육체를 만지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엘리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의 피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겠다고 말하며 호칸의 욕망을 부추긴다. 결국 엘리와 호칸의 관계는 일방적인 주인과 하인의 관계보다는 서로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기이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호칸은 엘리의 육체를 원하고, 엘리는 호칸의 도움을 받아 피를 원하는 것이다.
호칸이란 인물은 지나치게 아이에게 집착하는 왜곡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욕망과 양심의 가책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한다. 피를 구하고 난 뒤 거리를 방황하는 호칸의 행동에서 일말의 양심적인 면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욕망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하는 길을 선택한다. 다만 책에서 묘사된 그의 최후가 흥미로운데, 영화에서 보여지는 호칸의 마지막 모습이 그에게는 오히려 구원이자 안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범죄에 실패한 호칸이 염산을 뒤집어쓴 뒤 혼자가 되어버린 엘리는 결국 생존을 위해 사람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사람을 살해하고 피를 흡혈하는 엘리의 행동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이 생존을 위한 행위였음을 인정한다. 살인 행위를 비난하는 오스카르의 말에 항변하는 엘리의 목소리는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달라고 애원하는 한 아이의 절규처럼 들린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누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만 해도 정말로 그 사람이 죽는다면. 그래도 안 할거야?"
"...절대 안 해."
"반드시 할걸. 그것도 재미를 위해서. 복수를 위해서. 난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거야. 다른 방법이 없어서."
"하지만 그건... 걔들이 날 때리기 때문에, 날 괴롭히기 때문에, 왜냐하면 나는..."
"왜냐하면 넌 살고 싶은니까. 마치 나처럼."
엘리는 두 손을 뻗어 오스카르의 뺨에 대고 그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잠시 내가 되어봐"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2권, p161)
인간의 초대를 받지 못하면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움을 겪는 것처럼 엘리는 인간 세계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피를 먹지 못하면 생존을 할 수 없는 엘리는 인간을 찾아 피를 빨아야 하고 그 댓가로 그는 인간의 분노를 사고 만다. 엘리의 희생자들이 라케라는 남자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엘리에게 감염된 후, 라케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선택한 비르기니아의 죽음은 라케에게 엘리에 대한 증오를 불어넣는다. 생존을 위해 사람들에게서 피를 구하는 엘리의 행동이 황량한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꿈을 짓밟아버리게 되는 악순환의 과정은 씁쓸하기 그지 없다.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죄책감으로 방황하는 엘리가 끝내 죽음까지 고려해보는 장면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하느님, 하느님? 전 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거죠? 왜 저는..."
전부터 수없이 거듭해왔다. 이 질문을.
왜 저는 살면 안 되는 건가요?
왜냐하면 너는 죽어야 하거든.
딱 한 번, 전염되고 난 후 엘리는 다른 전염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성인 여자였다. 가발 쓴 남자 못지않게 냉소적이고 내면이 공허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엘리는 그녀에게서 당시 자신을 괴롭히던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같은 존재가 많나요?"
여자는 고개를 젓더니 연극적인 말투로 슬퍼하며 대답했다.
"아니, 우린 정말 희귀한 존재야. 진짜 희귀해."
"왜죠?"
"왜냐고?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까. 바로 그 때문이야. 너도 그건 알아야 해. 정말 무거운 짐이야. 아아, 정녕..." 그녀는 손을 파르르 떨더니,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오오, 내 양심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도저히 감당 못해요."
"우리가 죽을 수도 있나요?"
(중략)
"여기,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어. 하지만 지금은 나의 벗이여, 나한테 근사한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엘리는 그 근사한 생각에서 도망쳤다. 전에 그랬듯. 이후에도 그랬듯.
엘리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천천히 뛰는 심장을 느꼈다. 어쩌면 그가 어린아이여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스스로 끝장내지 못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양심의 가책보다 살려는 의지가 더 강했다. (2권, p214~215)
오스카르와 엘리의 사랑은 영화처럼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한편으론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스카르와 엘리 사이를 가로막는 벽은 단지 집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인간과 뱀파이어라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종족의 만남 그리고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기 힘든 엘리의 성정체성은 자연히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오스카르는 엘리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엘리라는 존재를 갈구하며,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마음 속의 진실을 털어놓으며 소년에게 절실하게 다가온다. 왜 그들은 그토록 상대방을 그리워하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원했을까.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외롭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학대받는 소년과 영원히 열두 살이 되어버린 이후 평생을 홀로 지내야했던 뱀파이어 소녀는 상대방을 통해 삶의 위안을 얻고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가 떨어져 있을 수록 상대방을 향해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함께 있을 수 없다. 엘리의 살인 행위가 계속되면서 그를 향한 분노를 가진 자들이 다가와 엘리를 위협한다. 오스카르는 엘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스카르의 주변에 있을 수록 그에게 더 큰 고통과 위험을 안겨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엘리는 오스카르와 작별을 나눈 뒤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엘리가 떠난 후 오스카르는 그에 대한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게다가 오스카르가 속해있는 사회는 여전히 그를 받아 들여주지 않는다. 욘니는 오스카르의 반격으로 쓴 맛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 대한 증오와 복수를 지니고 있으며, 그의 부모와 선생님들은 여전히 아이의 고민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거리감이 존재한다. 결국 오스카르에게 엘리는 없으면 안 될 소중한 연인이며 그의 생각을 이해할 줄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는 것이다. 엘리의 빈 자리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모습이 쓸쓸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날 밤 오스카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 창가로 갔다. 놀이터 정글짐에서 뭔가를 본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까지 정글짐의 그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가만히 벽을 두드렸다. 답신은 없었다. 손끝과 손마디가 콘크리트 위를 두드리는 그 건조한 소리는, 마치 영원히 닫혀버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2권, p311)
결국 서로를 간절히 원하던 두 아이는 그들을 괴롭혀대고 고통스런 삶을 안겨주던 블라케베리에서 사라져 버린다. 객실 칸에서 커다란 짐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오스카르의 모습은 자신을 괴롭히던 현실 속에서 탈출을 꿈꾸는 희망이 느껴진다. 그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결국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결말을 내고 있지만 소설 '렛미인'의 마지막 장면은 오스카르가 호칸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두려움을 남긴 영화의 엔딩과 다른 여운을 남긴다. 옮긴이의 말에 쓰인 작가의 글이 눈길을 끄는데, 과연 그가 생각한 오스카르와 엘리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이제 엘리에게 새로운 조력자가 생겼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의도한 엔딩이 아니다. 나는 '렛미인'의 에필로그에 별도의 짧은 에필로그를 더 써놓았다. 몇년 후에 발표할 예정으로, 분량은 대여섯 페이지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가 직접 선보이는 엔딩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토마스의 엔딩이 지배할 것이다. 영화상으론 정말 멋진 엔딩이다. 완벽하다. 하지만 나의 의도와는 다르다. 책에 잠깐 비춰지긴 하지만 엘리는 이미 성인이 된, 타락한 호칸을 선택했다. _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2권, p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