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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로프트]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


로프트 (ロフト)
구로사와 기요시, 2005년

서서히 가슴을 조여 오는 공포

소설이 써지지 않는 여자는 이유도 없이 진흙을 토해낸다. 고고학자인 남자는 진흙을 마시고 미라가 된 천 년 전 여인에게 자꾸만 매혹된다. 그들 주변을 음산한 표정으로 비밀을 감춘 여자의 혼령이 배회한다.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자리한 오래된 집에서 만난 두 남녀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함께 겪으며 서로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이야기는 점점 진흙과도 같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로프트>는 수수께끼 같은 영화다. <큐어> <회로> 등 구체적인 설명 대신 생각의 여지를 열어놓은 영화들을 주로 선보였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지만, 그의 2005년 작품 <로프트>는 전작들에 비하면 한층 더 불가해하다. 한정된 공간과 제한된 등장인물 등 간소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속에 빼곡히 들어찬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와 상징들로 더욱 모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창고를 뜻하는 ‘로프트(loft)’를 제목으로 내세운 것처럼 <로프트>는 귀신 들린 집이라는 비교적 장르적인 설정을 영화의 밑바탕에 깔아놓는다. 요양도 하며 소설도 쓸 겸 편집장의 도움으로 외딴 곳의 집으로 이사 온 소설가 하루나 레이코(나카타니 미키)가 기이한 일들을 겪으며 그 집에 얽힌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은 무척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는 여기에 고고학자 요시오카 마코토(토요카와 에츠시)와 천 년 전 미라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내며 영화를 자신만의 색깔로 그려나간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진흙을 마시고 미라가 된 여인이 천 년이 지나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저주를 걸었다”는 자막처럼, 천 년 전 미라의 전설은 그 영겁의 세월만큼이나 미스터리함을 더하며 영화를 한층 모호한 분위기로 이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레이코의 집에 얽힌 비밀만큼은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요시오카가 매혹당하는 미라에 대해서만큼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80년 전에도 미라를 발견했던 연구팀이 왜 다시 미라를 늪 속에 감출 수밖에 없었는지, 요시오카가 미라에 매혹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미라의 환영이 요시오카를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만큼 영화가 생각할 여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만큼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불가해한 이야기임에도 영화의 주제를 이해할 최소한의 근거만큼은 남겨놓았던 전작들에 비해 오로지 불가해함으로 채워져 있는 <로프트>가 그의 전작들에 비해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럼에도 <로프트>는 구로사와 기요시만의 공포가 변함없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영화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한정된 공간을 충분히 활용한 촬영을 통해 공포를 만들어내는 몇몇 순간들이다. 고정된 숏들과 핸드헬드로 촬영된 숏들을 교차시키며 영화에 한층 불안한 분위기를 더하는가 하면, 작은 카메라 이동과 적절한 프레임의 활용 등을 통해 구로사와 기요시는 서서히 가슴을 조여 오는 듯한 공포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기분을 오싹하게 만드는 현악기의 음산한 사운드 또한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그렇게 구로사와 기요시는 <로프트>를 천천히 잠식당해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는 공포로 만든다.

<로프트>가 변함없는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인 것은 전작들이 그랬듯 <로프트> 또한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모습들을 공포의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이 겪게 되는 기이한 사건들은 사실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저지른 잘못들을 각자의 마음속에 감춘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속 깊이 감춰둔 진실들이 그들의 삶을 옭매여오며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로프트>가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구원을 바라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의 기대마저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로프트>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통해 절망을 이야기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