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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레바논] 인간은 강철이 아니다.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다가 2009년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레바논>을 보았다. 영화의 초반, 탱크 안에 새겨져 있는 글귀가 클로즈업된다. "Man is steel, the tank is only iron." 그러나 <레바논>에서 보여주는 인간은, 오히려 평균적인 인간보다는 좀더 강인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군인들마저도, 한없이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1980년대 레바논으로 진격한 이스라엘 병사들이 겪는 이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탱크 안을 배경으로 하는 특이한 관점을 고수한다. 마지막 컷을 제외하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좁디좁은 탱크 안의 모습과 탱크의 포격용 관측창을 통해서 바라본 시야에만 갇혀서 화면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거나 단조로울 틈은 한순간도 없다.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는 불안이 엄습하는 긴장감과 가해자로서의 군인이 가지는 양심의 갈등을 끊임없이 이어가면서 날카로움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동시에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듯한 공간의 갑갑함은 서스펜스의 영리한 요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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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마치 네 명의 병사들과 함께 탱크 안에 갇혀 있는 느낌으로 탱크 내의 어둠과 기계음, 엔진 소리에 시달려야 하며, 탱크 바깥의 생명체들을 포격 대상의 목표물을 바라보는 창을 통해서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순진한 군인들이 겪는 혼돈과 절망에 생생하게 동참한다. 민간인을 향해서 발포해야 하는 순간 머뭇거렸던 포병은 자신의 머뭇거림이 동료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결과에 절망한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전쟁의 비정한 법칙은 강철로 만든 탱크 안의 병사들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별다른 명분도 없이 전쟁에 참전한 청년들은 단지 상부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하고, 그들이 이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영원히 지우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전쟁터에 내몰린 이상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거나 정신적으로 영혼의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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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반전영화가 그러하듯이, 가축을 키우며, 체스를 두며 평화롭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초토화가 된 마을의 모습,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시체들의 끔찍한 모습,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처절한 절규, 분노를 눈동자 속에 감춘 노인의 무표정한 얼굴 등을 통해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전쟁의 과정 자체에 보다 집중하는 이 영화는 새로운 형식의 반전영화이다. <레바논>은 전쟁이 피해자들의 생명과 터전을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가해자들의 정신적 상처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을 황폐화시키며 그것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원한에 찬 복수심보다 악몽같은 죄책감이 더 깊고 무겁지 않을까.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신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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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쟁으로 인해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기억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을 이스라엘에서는 최근 가해자로서의 반성을 담은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2008년 <바시르와 왈츠를>에 이은 <레바논>은 좁은 공간에 한정된 전쟁 영화이면서도 전쟁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사무엘 마오즈 감독의 자전적인 작품이자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를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전 거부를, 병역 기피를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 같다. 어차피 전쟁을 주도하는 이들과 무기를 공급하는 이들은 절대로 반성하거나 바뀌지 않을 테니까, 정작 전장에 내몰리고 상처를 입을 이들이 전쟁을 거부하는 방법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