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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달콤함과 잔인함을 동반한 환상 속으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The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
테리 길리엄 감독, 2009년

상상력이 부재한 세상을 향한 테리 길리엄의 동화

“어제 극장에서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예고편을 봤다. 같은 폭발 장면과 같은 음향, 같은 리듬을 지닌, 그냥 다 똑같은 영화였다. 할리우드는 지난 20년 동안 이런 영화들을 만들어오고 있다. 언제 이런 게 끝이 날까?”


테리 길리엄은 할리우드가 획일적으로 양산해내는 블록버스터에 반기를 들고 작업을 해오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하나다. 할리우드의 관습적인 서사와 형식을 거부하는 테리 길리엄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광기의 세계를 동화적인 상상력과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담아내는데 온힘을 쏟으며 부단히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블록버스터의 겉옷을 입고 있지만 그 속에는 변함없는 자신만의 주제를 담아낸 <브라질> <12 몽키스>가 테리 길리엄에게 다가가기 위한 가장 대중적인 접근이라면,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낸 경계에서 배제된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피셔 킹> <타이드랜드>는 테리 길리엄의 영화 세계를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한 가이드북이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언제나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논리적인 분석보다는 비논리적인 감상으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테리 길리엄의 영화를 처음 본 관객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마치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낯선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능력을 지닌 파르나서스 박사(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유랑극단을 이끌고 거대한 도시 런던을 떠돌며 악마와 내기를 한다는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시놉시스만으로는 영화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없는 영화다. 파르나서스 박사가 만들어내는 ‘상상극장’ 속 환상의 세계는 현실을 초월한 그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논리적인 서사의 흐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감춰진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파르나서스 박사와 악마 닉의 대결은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 토니(히스 레저)와 평범한 가족을 꾸리고 싶어 하는 파르나서스 박사의 딸 발렌티나(릴리 콜)의 에피소드까지 이야기의 가지를 한없이 뻗어나가는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가득 차있다.

“상상력이 있는 한 이야기는 계속돼야 한다.” 한때 수도승이었던 파르나서스 박사가 제자들에게 전하던 이 가르침은 모호한 영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한 열쇠다. 테리 길리엄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파르나서스 박사를 통해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상상력이 부재한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상상극장’을 통해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무의식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전하고자 하는 파르나서스 박사에게서 영화를 보는 시각을 한정짓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 오직 상상력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테리 길리엄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은 우연만이 아니다. 눈에 밟히는 서사의 허점과 이와는 무관한 이미지의 향연으로 완성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은 분명 많은 대중의 호감을 이끌어낼 영화는 아니다. 또한 테리 길리엄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기에도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그럼에도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영화 속 파르나서스 박사처럼 현실 속에서 상상의 힘으로만 쉼 없이 영화를 만들어온 테리 길리엄의 지독한 작가적인 태도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히스 레저의 유작이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한다고들 한다. 그렇기에 영화에 대한 평가는 완성된 영화만으로 온전히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영화는 제작과정처럼 영화 외적인 부분들로 그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단지 난해하다는 사실만으로 평가 절하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알려진 대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의 제작은 수월하지 않았다. 토니를 연기한 히스 레저의 갑작스런 죽음,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 뒤 프로듀서 윌리엄 빈스마저 세상을 떠나고 테리 길리엄마저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악재가 겹쳤지만,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파렐이 히스 레저와의 우정으로 영화에 출연해 촬영을 재개한 영화는 배우들과 스탭들의 의지로 마침내 완성될 수 있었다. “만약 나까지 촬영 도중 죽었다면 정말 말끔한 결말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죽이지는 못했다. 나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여기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테리 길리엄은 ‘히스 레저와 친구들’의 이름으로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히스 레저에게 바친다. 그리고 또 다시 상상력이 부재한 세상에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쉼 없이 걸어갈 것이다.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