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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나인] 원작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화려함을 선택하다


나인 (Nine)
롭 마샬 감독, 2009년

원작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한 리메이크의 한계

‘전 세계를 사로잡을 지상 최대의 쇼!’라는 영화 카피처럼 <나인>은 포스터만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다. 페넬로페 크루즈, 니콜 키드먼, 마리온 코티아르, 케이트 허드슨, 주디 덴치, 소피아 로렌, 퍼기 등 세대를 초월한 눈부신 여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사실과 이들의 중심에 자리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존재감, 그리고 <시카고>로 뮤지컬영화 연출의 재능을 인정받은 롭 마샬 감독의 이름까지 당당히 내건 <나인>은 이들의 화려한 면모만으로도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천재 영화감독 귀도(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영화의 스토리는 화려한 캐스팅에 비하면 비교적 간결한 편이다. 9번째 장편영화 연출을 눈앞에 두고 창작의 고뇌에 빠진 귀도는 기자회견장에서 도망쳐 새로운 창작을 위해 휴양지로 떠난다. 그곳에서 귀도는 아내 루이사(마리온 코티아르)와 정부 칼라(페넬로페 크루즈)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한편, 잡지 기자 스테파니(케이트 허드슨)의 유혹을 애써 뿌리치며, 어릴 적 추억의 여인 사라기나(퍼기)의 기억을 떠올리고, 다음 작품을 함께 하기로 한 배우 클라우디아(니콜 키드먼)로부터 희망을 얻고자 한다. 그런 귀도를 동료인 릴리(주디 덴치)와 어머니 맘마(소피아 로렌)가 곁에서 지켜보며 위안이 돼주지만, 귀도의 고민은 더욱 깊어져만 갈 뿐이다.

<나인>에서 롭 마샬 감독이 집중하는 것은 말 그대로 스크린 자체를 하나의 버라이어티 쇼의 무대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인>은 여덟 배우들이 참여한 12곡의 노래를 통해 화려한 춤과 음악의 향연을 펼쳐나간다. 여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영화의 막을 여는 ‘Overture Delle Donne’부터 페넬로페 크루즈의 관능적인 매력이 빛을 발하는 ‘A Call From the Vatican’, 퍼기의 놀라운 가창력과 육감적인 풍모가 강한 인상을 남기는 ‘Be Italian’, 케이트 허드슨의 놀라운 변신을 발견할 수 있는 ‘Cinema Italiano’, 순수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마리온 코티아르의 ‘My Husband Makes Movies’와 ‘Take It All’ 등 시종일관 관객들의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퍼포먼스들이 이어지며 <나인>은 관객의 정신을 빼앗는다. 그러나 각각의 뮤지컬 시퀀스들이 지닌 매력들이 한 편의 영화로 합쳐지면서 느낄 수 있는 화학 작용은 그리 크지 않다. <나인>은 정작 ‘지상 최대의 쇼’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롭 마샬의 데뷔작 <시카고>와 비교했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뮤지컬 무대 위의 흥분과 쾌감을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재현해냈던 <시카고>에 비해 <나인>은 뮤지컬영화로서의 매력이 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시카고>와 <나인>은 태생적으로 출발점이 다른 영화이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연출가로 명성을 떨친 롭 마샬에게 <시카고>는 단순히 뮤지컬 원작이 지닌 매력을 스크린 위에서 재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그의 재능을 발휘하기에 제격인 작품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뮤지컬이기 이전에 이탈리아영화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가 1963년에 발표한 고전 <8과 1/2>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나인>은 원작이 지닌 그 무게감만으로도 롭 마샬에게는 도전하기 쉽지 않은 프로젝트임이 분명하다. 지금까지도 <8과 1/2>이 고전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예술가가 보편적으로 겪는 창작의 고뇌를 묘사하는 동시에 펠리니의 자전적인 부분을 반영해 영화에 깊이를 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8과 1/2>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드러내 보인 주제의 진중함은 춤과 음악이 중심에 선 뮤지컬 무대로 올라오면서 자연스레 그 무게감을 잃을 수밖에 없다. 대신 뮤지컬이 얻은 것은 춤과 음악으로 포장된 화려함이다. 이는 <나인>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8과 1/2>에서의 귀도가 여인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삶에 대해 예술가의 고뇌로 다가오는 것과 달리 <나인>에서의 귀도가 단지 여성 편력이 화려한 바람둥이 감독처럼 보이는 것은, 그래서 <나인>이 한편의 영화보다는 12편의 뮤직비디오를 모아놓은 모음집처럼 보이는 이유다.

알란 파커 감독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을 다시 리메이크한 <페임>이 그랬듯, <나인> 역시 원작이 지닌 아우라를 넘어서지 못하는 리메이크작의 운명을 고스란히 걷는다. 그럼에도 <나인>에 유일한 미덕이 있다면 롭 마샬 감독 스스로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 할 수 있고 무엇을 잘 하지 못하는지 잘 아는 롭 마샬 감독은 탄탄한 스토리와 깊이 있는 주제를 포기한 대신, 배우들이 펼치는 춤과 음악의 향연만큼은 완벽하게 연출해내며 뮤지컬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편으로 이는 영화적 재미가 기본적으로 화려한 볼거리로만 채워지지 않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나인>은 지상 최대의 쇼는 되지 못했지만, 한번쯤 볼만한 쇼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