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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두 편의 영화, <페어러브>와 <500일의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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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렵다.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평생을 쫓아다닐 숙명과도 같은 질문. 때로는 그 대답을 소설과 드라마, 영화 속에서 찾고자 하지만, 공식화된 로맨스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사랑 이야기뿐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페어러브>와 <500일의 썸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페어러브>, 세상과 세상의 만남, 그 변화

할리우드에 ‘40살까지 못해 본 남자’가 있다면, 서울 홍제동에는 ‘50살까지 연애 한 번 못해 본 남자’ 형만(안성기)이 있다. 필름카메라를 수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형만은 마치 부품과 부품들이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카메라처럼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묵묵히 카메라를 수리하며 일상을 반복하는 형만의 삶 속에 어느 날 스물다섯의 여대생 남은(이하나)이 불쑥 끼어든다. 세상을 먼저 떠난 오랜 친구의 부탁으로 남은을 보살피게 된 형만은 자신을 남자로 바라보는 남은의 시선이 자꾸만 불안하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도록 문을 굳게 걸어 닫은 형만의 공간은 남은의 등장으로 조금씩 닫혀 있던 문은 연다. “아저씨, 예뻐요.” 남은의 한 마디에 형만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50살 중년남과 25살 여대생의 로맨스를 그린 <페어러브>는 도발적일 수 있는 설정 속에서 진중하게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다. 기계 속의 부품처럼 변화 없는 삶을 지속하며 50년을 살아온 형만이 뒤늦게 찾아온 사랑으로 변화를 겪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곧 세상과 세상의 만남,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남은과의 연애를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면서 형만은 전에 없던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지금껏 완벽했던 형만의 삶 또한 조금씩 흐트러진다. 카메라 수리에 있어서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던 형만은 남은과의 연애가 시작된 뒤부터 잦은 실수를 범한다. 딸 같은 남은과의 연애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주위 시선도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자신의 나이에 비해 한참 젊은 남은의 마음이 순식간에 변해버릴까 안절부절 못한다. 남은으로 인해 형만은 그동안 갇혀 있던 자신만의 공간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한 발자국 발을 내딛지만, 50년의 세월은 그에게 세상을 더 큰 두려움으로 여기게 만들 뿐이다.

“모든 죄악과 고통의 씨앗은 두려움이다.” 남은과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형만에게 목사 친구는 말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필요하다. <페어러브>는 그 용기가 바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이를 위해 형만의 고민과 갈등, 그 속에서 겪는 감정 변화를 묘사하는데 좀 더 초점을 둔다. 반면, 남은의 경우에는 그녀의 심리와 행동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아 공감가지 않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형만과 남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순간들, 이를 감성적으로 포착해내는 신연식 감독의 연출력, 여기에 낡은 필름카메라와 오래된 홍제동의 풍경 등 옛것을 향한 아날로그적인 향수까지 <페어러브>는 통속적인 로맨스와는 전혀 다른 정서로 사랑을 이야기하며 작은 울림을 낳는다. 남은으로 인해 형만이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오랫동안 짝사랑했지만 결국 뒤늦게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형만의 조카처럼 <페어러브>는 그럼에도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를, 혹은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서로 다른 세상의 충돌이 빚어내는 변화이므로.

<500일의 썸머>, 우주의 유일한 진리, 그것은 우연

사랑은 운명이라고 믿는 남자가 있다. 어릴 적부터 조이 디비전의 티셔츠를 입고 영국 팝 음악의 우울함에 빠져 지낸 톰(조셉 고든 레빗)은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여인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사랑은 운명이 아니라고 믿는 여자가 있다. 키도, 몸무게도 지극히 평범하지만, 벨 앤 세바스찬의 노래 가사를 졸업앨범에 적을 정도로 특별한 매력을 지닌 썸머(조이 디샤넬)는 어릴 적 부모의 이혼 뒤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친구처럼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스미스의 음악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더 없이 행복하게 시작하지만,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은 조금씩 두 사람의 행복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빤한 러브스토리는 아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내레이션으로 막을 여는 <500일의 썸머>는 사랑은 운명이라고 믿는 남자 톰이 사랑은 우연이라고 믿는 여자 썸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행복을 느끼다 끝내 실연의 아픔을 맞이하게 되는 500일 동안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사랑의 달콤함은 물론 그 달콤함이 깨지는 잔인한 순간까지 지극히 현실적으로 담아낸 영화는 마치 허진호의 멜로영화를 연상케 한다. 그럼에도 <500일의 썸머>는 그 어떤 로맨스영화 못지않은 사랑스러움으로 관객의 이목을 끈다. 위저, 그린데이, 마이 케미컬 로맨스 등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마크 웹 감독은 자신의 재능을 살린 재치 있는 연출로 달콤했던 사랑의 순간과 사랑이 식어가는 순간을 절묘하게 교차시키면서도 이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감성으로 담아낸다. 썸머와 처음으로 하룻밤을 보낸 뒤 한껏 들뜬 톰의 마음을 홀 앤 오츠의 노래 ‘You Make My Dreams’로 표현한 뮤지컬 시퀀스, 썸머와 헤어진 뒤의 아픔을 담아낸 흑백 무성영화 신, 다시 만난 썸머를 향한 톰의 기대와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신 등 기발함으로 가득한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서 빛난다. 여기에 톰과 썸머를 연결시켜주는 스미스를 비롯해 클래쉬, 픽시즈, 도브스, 레지나 스펙터, 파이스트, 그리고 조이 디샤넬의 노래까지 영화 내내 이어지며 특유의 감성을 잃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500일의 썸머>는 사랑이 불타올랐다 식어가는 과정만을 그리는데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떤 로맨스영화도 하지 못한 성취를 이뤄낸다. 한없이 뜨거웠던 썸머와의 사랑이 끝난 뒤, 사랑은 운명이라고 믿었던 톰은 이제 더 이상 운명 따위는 믿지 않는다. 반면, 썸머는 톰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은 운명일 수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인연과 결혼에 이른다.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닮아갔음에도 끝내 이별을 맞이한다. 하지만 사랑의 아픔은 언제나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법. 운명에만 집착했던 톰은 마침내 ‘우주의 하나뿐인 진리는 우연’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며 썸머와의 관계가 남긴 상처를 이겨낸다. 운명적인 사랑, 기적 같은 만남, 필연적인 관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연일 뿐임을 깨닫는 순간, 톰은 여름이 오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또 다른 삶의 여행을 시작한다. <500일의 썸머>는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사랑의 낭만을 걷어낸 그 자리에 <500일의 썸머>는 현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공감 가는 로맨스를 그려나간다. 삶은 우연이라는 그 단순한 진리로 사랑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이토록 공감가는 로맨스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