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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리 걸 (Factory Girl,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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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놓쳤던 극장 개봉작들 가운데 하나인 <팩토리 걸>을 뒤늦게 DVD로 봤습니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의 일원으로 당대의 여신으로 군림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에디 세즈윅(Edie Sedgwick, 1943 ~ 1971)의 전기 영화죠.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후딱 달려가서 보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의 줄거리가 빤히 보였다고 할까요. 별로 궁금하지가 않았습니다. 스틸 컷을 보니 가이 피어스가 앤디 워홀로 출연을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부자연스러워 보이더군요.1) 그렇게 어물쩍거리다가 결국 극장 상영을 놓치고 말았는데 최근 스티브 부세미가 감독, 주연한 <인터뷰>(2007) 에서 시에나 밀러를 처음 보고 급호감이 발동했습니다. <팩토리 걸>의 포스터에서 본 고전적인 이미지와 달리 약간 보이쉬한 느낌의 현대적인 미인이더군요. 지나치게 완벽한 코와 치열 때문에 자연 미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어쨌든 연기 잘하는 동시대 미녀 배우의 주연작을 이제라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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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세즈윅이 죽기 전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었던 당시에 의사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팩토리 걸>은 어두웠던 가족사,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통해 영화 초반부터 관객의 뺨을 한 대 후려치면서 시작합니다. 비범했던 외모 만큼이나 비범한 성격의 인물이었던 에디 세즈윅은 앤디 워홀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일약 뉴욕 언더그라운드 예술계의 아이콘으로 우뚝 서게 되지요. 가이 피어스가 연기하는 앤디 워홀과 팩토리의 일원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후반부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코도 등장하더군요. 평생 피부 질환에 시달렸던 앤디 워홀을 연기하기 위해 얼굴의 발진이나 입술 부위에 뭐가 돋아있는 등의 특수 분장에 화장을 하고 가이 피어스가 등장하는데 사실적인 묘사도 좋긴 합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헤어스타일과 의상 정도만 비슷하게 했어도 가이 피어스는 훌륭한 앤디 워홀이 되었을텐데 말이예요.

에디 세즈윅과 앤디 워홀이 갈라서게 되는 과정에서 포 크 가수(헤이든 크리스텐슨)가 등장하는데 헤어스타일과 의상, 그리고 쉰 목소리의 사투리 연기가 저거 밥 딜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크리딧에 Musician이라고만 나오는 이 인물은 밥 딜런이 아니라 빌리 퀸이라는 다른 포크 가수인데요, <아임 낫 데어>(2007) 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했던 쥬드 퀸과 코코(미셸 윌리엄스)의 관계하고 연관이 되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2) 에디 세즈윅은 빌리 퀸과의 사랑이 평생의 유일한 경험이었다고 술회하면서도 에디 세즈윅은 결국 팩토리를 떠나지 못하고 말죠. 어쨌든 빌리 퀸과의 관계는 앤디 워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고 이후 에디 세즈윅은 급격히 망가지게 됩니다. 앤디 워홀은 빈곤함과 마약에 찌든 에디 세즈윅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도 결국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냉담한 인물로 그려지고 영화는 에디 세즈윅이 사망한 사실에 대해 앤디 워홀이 남의 일처럼 인터뷰에 임하는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삽입하면서 확인 사살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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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리 걸>의 DVD는 극장 상영 버전 보다 11분 가량이 추가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느 장면이 극장 버전에서 삭제된 것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별도의 삭제 장면이 감독의 음성 해설과 함께 따로 있는 것을 보아 제 생각에는 DVD 버전이 원본이고 국내 상영 시에 러닝타임을 줄이느라 적당히 들어냈었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감독과 배우 코멘터리가 아쉽게도 제공되지 않고 있지만(감독님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타입인 것 같던데) 메이킹 필름과 시에나 밀러의 오디션 장면 비디오, 가이 피어스의 비디오 다이어리 등의 부록 영상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에드 세즈윅의 삶의 진실>은 이제는 노년의 나이가 된 에디 세즈윅의 주변 인물들과 감독, 작가 등의 인터뷰 모음인데 영화 본편 이상으로 생생하고 자세하게 에디 세즈윅의 삶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영화 본편이 에디 세즈윅을 주인공으로 해서 정서적인 감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드라마였다면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는 거의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실제의 에디 세즈윅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정확하면서도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팩토리 걸>은 60년대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씬을 무대로 매우 각별했던 인물의 삶을 다루고 있는 만큼 특별한 형식적인 기교가 없이도 충분히 흥미롭고도 강렬한 드라마를 선보이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흔히 불꽃 같은 삶이라는 표현을 접하고는 하는데 에디 세즈윅이야말로 불꽃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불꽃에 기름을 부어주었던 것은 지독하게 불행했던 가족사와 앤디 워홀과의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에디 세즈윅 역을 맡아 한 편의 영화를 시종일관 이끌어간 시에나 밀러의 팔색조 연기에는 100점을 줄 수 있겠고요, 가이 피어스는 앤디 워홀을 제법 사실적으로 연기하긴 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못한 편입니다. 헤이든 크리스텐슨은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특히 목소리 연기가 다소 어색한 것 같았는데 점차 나아지더군요. 조지 히켄루퍼 감독은 연출작이 10편 가량 되는 중견 감독인데 <팩토리 걸>이 한 인물의 삶을 담아낸 전기 영화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이 되도록 무난한 연출을 선보인 듯 합니다. 평이한 내러티브이긴 하지만 비주얼과 음악의 사용 등은 지루할 틈을 전혀 주지 않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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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껏 앤디 워홀을 연기했던 배우들 가운데 앤디 워홀의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었던 배우는, 사실 배우이기 이전에 너무나 유명한 뮤지션인 데이빗 보위였습니다. 화가이기도 한 줄리안 슈나벨 감독의 데뷔작 <바스키아>(1996)에서 앤디 워홀은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로 다뤄지기도 했지만 데이빗 보위가 배역을 맡으면서 신비로우면서도 따뜻한 감정을 지닌 인물로 등장할 수 있었죠. 제목에서부터 앤디 워홀이 등장하는 매리 해론 감독의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1996) 에서는 자레드 해리스가 앤디 워홀을 연기했는데 사진을 통해 널리 알려진 앤디 워홀과는 외양부터가 꽤 차이가 났었습니다. <팩토리 걸>과 마찬가지로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에서의 앤디 워홀은 다른 이들의 재능을 착취하는 상당히 냉정한 인물로 비춰집니다.

2) <아임 낫 데어>를 볼 때에는 밥 딜런이 당시에 에디 세즈윅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팩토리 걸>을 보니 당대의 언더그라운드 씬과 밥 딜런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빌리 퀸과 에디 세즈윅의 관계를 빌려온 것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임 낫 데어>에 등장한 코코라는 인물은 굳이 에디 세즈윅이 아니라 다른 누가 되었더라고 큰 상관이 없긴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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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에 "밥 딜런이 맞다"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이 계셔서 검색을 해봤더니 <팩토리 걸>에서 다뤄지는 자신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밥 딜런이 소송을 거는 바람에 크리딧에 Musician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가고, 부록의 인터뷰에서조차 주변 인물들이 모두 '빌리 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하네요.

ps2. 루 리드가 이 영화에 대해 역겹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악평을 했더군요. 특히 시에나 밀러와 헤이든 크리스텐슨이 연기한 두 인물의 관계가 많이 거슬렸나 봅니다.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상업 영화스럽게 다뤄진 부분이긴 해요. <팩토리 걸>은 에디 세즈윅의 삶을 상업 멜러의 틀에 담아놓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팔아먹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