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home

오타루에서 온 러브레터(Love Letter, 1995)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타루에 간다면 당신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와이 슌지가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오타루에서 ‘러브레터’를 찍었는지. 그로 하여금 이토록 아름다운 러브레터를 쓰게 한 것은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홋카이도의 그 작고 오래된 도시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스라한 추억이 담긴 그 소중한 편지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타루 역에 내리는 순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그 도시가 ‘러브레터’의 영상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이와이 슌지가 일부러 오타루의 동화 같은 모습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속의 오타루는 실제의 오타루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오타루에 간다면, 여전히 교복을 입고 눈밭을 뛰어다니는 살아있는 ‘후지이 이츠키들’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와이 슌지가 의도적으로 디즈니랜드 같은 오타루라는 도시를 
있는 그대로 예쁘게만 찍었다면,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가 그러하듯 우리가 받은 러브레터는 안목 없는 사람이 고른 싸구려 편지지에 쓰인 유치찬란한 사랑고백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구깃구깃 편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간신히 다 읽었기는 했지만 까맣게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는 흔하디 흔한 모조품 기억 대신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러브레터’를 보내준
이와이 슌지의 섬세한 감성에 무엇보다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제 ‘러브레터’를 받은 지 십년이 흘렀지만
이 영화는 조금도 진부해지지 않았으며 반대로 여전히 눈부시고 매력적이다. 아니, 그토록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 아스라하고 아름다운 ‘러브레터’가 더욱 더 소중하고 그립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남겨진 모든 추억이 그렇듯. 이제는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기억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러브레터’가 원래 천국에 보낸 편지이기는 해도
이 영화가 ‘죽은 자에게 바치는 애도’인 것은 아니다. ‘러브레터’의 미덕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위한 것이며, ‘잘 지내세요? 저는 잘 지내요’라고 외치며 눈밭을 달리던 히로코의 모습이 리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그녀 자신이 앞으로 한발자국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 연인을 잃은 사람들이 슬픔을 딛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러브레터’는 담담히 보여준다. 이르든 늦든 결국 우리는 그의 상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미련은 남고 슬픔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시간이 멈춰진 죽은 자를 대신해 아무것도 아니어서 소중해진 추억을 안고 우리는 사랑하고 웃으며 다투고 아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한겨울의 산에서 조난당하고 죽어가는 순간에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 파란 바람이 부는 남쪽 섬에 대한 노래를 부르던 후지이 이츠키는 슬픔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기억도 같이 남겨둔 채 떠났고, 히로코가 죽은 연인에게 보낸 편지는 살아있는 자신을 위해 천국에서 되돌아온다.


그리고 뒤늦게 러브레터를 받은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는
그녀 자신이 모르던 새로운 과거를 발견하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지막장에 담겨있던 그 사랑고백은 흩날리던 커튼 사이로 그 소설을 읽던 소년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아련하다. 세월은 흐르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행복한 유년시절은 이미 예전에 끝나버렸지만, 타인이 뒤늦게 찾아준 그 기억은 두고두고 그녀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길도, 집도, 유행하던 옷도 사라져버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프루스트에게 무의지적인 기억이 그러했듯이.

잘못 보내진 러브레터는 제 주인을 찾고, 죽은 자는 남겨진 자와 더불어 행복하게 떠나간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살면서 경험한
슬프거나 행복한 추억과 마주칠 것이다. 슬픈 기억이 우리를 힘들게 하겠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의도하지 않은 순간 잃어버린 행복한 기억을 되찾을 지도 모른다.


산과 바다가 맞닿은 그 조그만 도시에서 우리는 교차로에서 엇갈리던 ‘러브레터’의 주인공들처럼 현재와 맞닿은 과거를 발견한다. 당신이 오타루처럼 아름다운 고장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그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비록 당신이 그 같은 행복한 기억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이와이 슌지의 잘못 보내진 그 편지가 우리에게 타인의 행복한 기억을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아스라하고 그리운, 아름답고 애달픈 그 추억의 맛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