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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기리노 나쓰오, <아웃>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은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그로테스크'라는 책이었다. 커리어 우먼이었던 한 여성이 매춘부로 이중 생활을 하다가 살해당한 사건을 토대로 여성의 심리나 악의를 묘사한 그녀의 서늘한 필체를 읽으면서 인간의 어두운 면에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읽은 '아웃'은 그녀의 대표적인 소설 중 하나인데, 그동안 읽을 기회가 없다가 최근에 책을 접하게 되었다. 두 권의 제법 두꺼운 분량이어서 처음엔 천천히 읽어가다가 속도감 있는 전개로 뒤바뀌는 2권에 이르러서는 거의 하루만에 책을 읽고 말았다. 과연 그녀의 대표작 답게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의 심리를 으스스하게 그려낸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웃'은 도시락 공장에서 야근 근무를 하는 네 명의 여성의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겉보기에 네 명의 여성은 함께 한 조를 이루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인물의 심리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어두운 나락 속에 빠져있음을 보여준다. 네 명의 여인 중 구니코는 외모 컴플렉스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사치와 향락으로 풀어가는 여자이다. 헤픈 살림으로 생겨난 빚을 갚기 위해 도시락 공장 야간 작업을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빚은 좀처럼 줄어지 않는다. 구니코의 입장에서 동료 야요이는 자신보다 아름다운 외모와 재산을 가진 여성이지만 사실 야요이의 삶은 남편 겐지의 변화로 인해 산산조각난 상태이다. 도박과 여자에 열중한 나머지 재산을 날린 것도 모잘라 폭력을 일삼는 남편 겐지에게 시달린 야요이는 하루가 지옥처럼 여겨질 뿐이다. 동료들에게 '스승님'으로 불리는 요시에 역시 피곤하고 잔인한 일상만이 그녀를 괴롭힌다. 자기 몸도 간수 못하는 시어머니 그리고 그녀를 단지 물적 수단으로 바라보는 두 딸에게 시달리는 요시에의 삶은 엉망진창이다. 이에 반해 마사코의 경우 다른 세 사람에 비해선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진 가정 주부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을 들어온 순간 가족적인 유대가 단절된 공간 안에서 홀로 지내는 듯한 고독감을 느낀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사회에서 겪은 심적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장벽을 쌓아간다. 서로가 단절된 공간에서 일상을 보내는 마사코는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품으면서도 그 공간을 일상처럼 받아들인 체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네 여인의 일상적인 삶을 뒤집는 사건이 발생한다. 겐지에 대한 증오로 넘치던 야요이가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남편을 살해하고 만 것이다. 넋을 잃은 야요이는 동료인 마사코에게 전화 연락을 취하며 자신이 저지른 사건을 고백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여인의 선택이다. 겐지에서 벗어나길 간구했던 야요이는 마사코에게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며, 마사코는 그녀의 의견을 듣더니 시체를 대신 처리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야요이의 범죄를 숨겨주기 위해 벌인 마사코의 작업은 본의 아니게 나머지 동료인 구니코와 요시에마저 합류하게 되면서 네 사람은 공범자가 된다.

야요이의 알리바이를 위해 남성의 시체를 분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세 명의 여인의 동기는 그들 내면에 있는 욕망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이 마사코의 계획을 돕는 목적이 금전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데 반해 정작 당사자인 마사코가 야요이를 돕는 목적은 물적인 동기보다는 심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점이 독특하다. 겐지의 흔적을 없애려는 마사코의 계획은 철두철미하고 냉정하지만 한편으론 동물적이고 충동적인 느낌도 없지 않다. 지옥이 어떤 것인지 느껴보고 싶다는 마사코의 말처럼 스스로를 나락으로 빠지도록 함으로써 서로 닫혀 지내는 가정에 충격을 전달하려는 마사코의 기행은 그렇게라도 해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여인의 절실함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전반부가 네 명의 여성이 완벽 범죄를 시도하는 장면을 으스스하게 묘사했다면, 후반부는 그녀들의 완벽 범죄로 인해 잠재된 욕망을 깨닫게 된 한 남자의 복수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겐지의 살인범으로 억울한 누명을 썼던 사타케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겐지의 주변 인물들을 홀로 조사하기 시작한다. 신중하면서도 냉정한 마사코의 사건 처리를 알게 된 그는 자신이 그토록 억누르고 있던 비틀린 욕망을 느끼게 된다. 야쿠자 시절 한 여인을 살해하면서 느낀 성적인 쾌감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는 흥분에 사로잡힌 사타케는 마치 사냥감을 쫓듯이 마사코의 주변을 매복하며 그녀가 함정에 걸리길 기대한다. 소설은 쫓기는 자와 쫓는 자 간의 대립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려나가며 인물들의 갈등을 마사코와 사타케 위주로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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