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세익스피어의 '멕베스', '리어왕' 같은 외국 문학작품을 일본적인 배경으로 옮겨와 영화화한 특징이 있는데, '밑바닥'이란 영화 역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다만 '거미집의 성'이나 '란'같은 영화가 희곡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영화적인 각색을 통해 원작과 다른 개성을 보였다면, '밑바닥'은 연극에 가까울 정도로 특정 장소 내에서 모든 에피소드들이 벌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밑바닥'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50년대 대표작들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7인의 사무라이'나 '숨은 요새의 세 악인'같은 영화의 경우 다양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미후네 도시로의 인물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데 반해, '밑바닥'에서 미후네 도시로는 허름한 공간 안에 거주하는 밑바닥 사람들 중 한 명에 가까울 정도로 비중이 다른 인물들과 균등한 편이다. 또한 비교적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을 담아내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50년대 영화들과 달리 하층민들의 비관적인 삶을 그렸다는 점도 '밑바닥'의 특징일 것이다.
영화는 밑에서 위를 바라본 듯한 각도로 위에 위치한 절의 외관을 드러내고 있는데, 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가 쓰레기장이라는 말을 하면서 낙엽들을 아래 절벽에 버린다. 흥미롭게도 낙엽은 아래로 떨어지면 벽 아래에 위치한 허름한 집을 드러낸다. 이처럼 영화의 배경이 되는 밑바닥의 공동 거주지를 드러낸 뒤 영화는 실내 공간으로 배경이 바뀐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인물이 거주하는 실내 공간 안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의 천태만상을 고정된 쇼트로 담아내고 있으며, 롱테이크로 인물이 나가고 들어오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거의 30여 분에 이를 정도로 고정된 카메라의 시야로 인물들의 생활상을 담아내고 있는데, 이같은 연출 방식을 통해 마치 연극 공간 안에서 인물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줌으로써 희곡의 특성을 살리고 있다.
일부 장면에서 인물이 문 밖을 나오면서 집의 외곽을 걷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정면이 아닌 마치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듯한 앵글로 촬영하고 있으며, 수평적인 시선으로 인물을 담을 때에는 유난히 벽의 아래에 위치한 인물들을 보여주는 특성을 보인다. 아래쪽에서 위를 바라보는 느낌을 주는 카메라의 촬영기법은 마치 밑바닥 사람들이 윗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험난하고 힘들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실제로 인물들은 대사를 통해 술집이나 거리를 나간다고 하지만 영화는 이들이 그 장소로 이동해서 각자 할 일을 하는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특정 인물이 집 바깥을 나간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 공동 거주지와 주인집 사이의 좁은 골목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공간의 폐쇄성을 느끼게 한다.
한편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약 10~15 명 정도인데, 영화는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반복시키면서 한 방에 약 5~6명 정도로 균형을 이루게 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공백을 두고 인물이 등장하고 퇴장하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을 모두 등장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흠이 있지만 관객들이 인물들의 특성을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한편 인물들은 서로 마주치면서 상대방과 인사를 나누고 갈등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런 과정의 연속을 통해 관객들은 각 인물들의 관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몰락 무사와 매춘부의 갈등을 통해 각 인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며, 도적인 스테키치가 집주인의 부인인 오스기와의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의 연인 관계가 어딘가 뒤틀려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의 초반부는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통해 공동 거주지에 사는 사람들과 관계자들의 특성을 이해하도록 한다.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인물의 등장과 퇴장 속에서 처음부터 이 곳에 살지 않았던 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밑바닥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다. 집주인의 아내인 오스기의 여동생 오카요가 등장하면서 새로 거주하게 된 방랑자 한 명을 집 안으로 들여보낸다. 마치 불교 순례자같은 누추한 옷차림을 한 노인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흰색 옷을 입어 다른 인물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 인물의 등장은 아무런 희망없이 살아가는 밑바닥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변화를 일으킨다. 거친 말투로 시비를 거는 밑바닥 사람들의 말을 재치있게 받아 넘기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땜장이의 아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노인의 자상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밑바닥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다.
밑바닥 사람들은 불교적인 진리에 대해 말하며 이 곳을 떠날 것을 충고하는 노인의 말을 웃어 넘기지만 한편으론 그를 통해 조금이나마 삶의 변화를 시도하려 한다. 예를 들어 배우였다는 주정뱅이는 노인의 말을 듣고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절이 어딘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벌어 들인 돈을 내보이는 행동을 통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 또한 스테키치가 짝사랑하는 오카요가 지옥같은 삶에 대해 진저리를 내자 노인은 그녀에게 스테키치와 함께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라는 충고를 한다. 하지만 노인 역시 어딘가 숨겨진 사연이 있는 인물이듯 공권력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런 노인의 불안정한 처지는 자연히 밑바닥 사람들의 희망 역시 사그라들 가능성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스테키치와 오카요의 만남에 질투를 느낀 오스기는 독사같은 악독함으로 자신의 친동생을 압박한다. 집주인 역시 오카요를 학대하며 그녀의 탈출을 막으려 한다. 다혈질적인 성질을 가진 스테키치는 두 사람의 악독한 괴롭힘에 분노해 집주인을 목조르려 한다. 스테키치와 오스기 간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영화는 공동 거주지 야외의 공간으로 배경을 옮김으로써 인물들의 관계가 악화되는 비극을 충격적으로 전달한다. 스테키치가 집주인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밀은 것이 그의 죽음으로 연결되자 오스기는 그를 살인범으로 몰아넣는다. 스테키치 역시 오스기의 악독함에 당하지 않겠다는 듯 살인을 유도한 그녀를 비난하고, 지옥같은 현실 속에서 광인이 되어버린 오카요는 두 사람이 자신을 파멸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말하며 스테키치를 외면한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후 영화는 스테키치와 집주인 일가 그리고 노인을 제외한 사람들이 방 안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노인이 사라진 뒤 그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를 한다. 하지만 노인이 사라짐으로써 일부 사람들은 지옥같은 밑바닥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을 드러낸다. 냉소적이고 현실에 대해 방관하는 인물들의 모습에 질린 매춘부는 집을 나서고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절을 찾고자 하는 퇴물 배우 역시 방문을 열고 집을 나간다. 이 두 인물을 방을 벗어날 때 처음으로 영화는 방문으로 나가려는 인물의 표정을 담은 쇼트를 보임으로써 자신을 구속하는 공간에서 벗어나려 하는 인물의 내면을 드러낸다.
이후 영화는 삶에 대해 방관하고 현실에 굴복하는 밑바닥 사람들의 모습을 '술'이라는 요소를 통해 보여준다. 술잔이 오가고 추가적으로 들어온 인물이 가져온 술이 오가면서 사람들은 현실을 잊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른다. 젓가락으로 그릇을 두들기면서 박자에 맞춰 노래를 흥겹게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가 계속되면서 영화는 현실에 굴복한 밑바닥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아내만 죽으면 이 곳을 빠져나가겠다는 다짐을 하던 땜장이는 이제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집주인 일가의 공백을 포졸과 엿장수 여인이 대체하면서 주인과 하숙인의 지배 관계는 여전히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흥겨운 노래가 지속되던 순간 방 안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퇴물 배우가 목을 매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한다. 퇴장했던 인물들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고 혼란과 충격으로 사람들이 정적을 이룬 가운데, 도박 사기꾼의 마지막 대사를 클로즈업 쇼트로 보여주면서 영화가 마무리되는 특징을 보인다. 죽음으로 술자리의 흥을 깬 퇴물 배우를 바보라고 일컫는 사기꾼의 마지막 말은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이기도 하지만 끝내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안타까움의 의미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50년대 영화들이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오락적인 재미가 많은 작품이 주를 이루지만 '밑바닥'이란 작품을 통해 실험적이고 삶에 대한 고민이 담긴 철학적인 작품도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되면 고리키의 원작을 읽어보고 다시 한 번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