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폰지하우스는 여름 시즌에 일본 영화제 같은 형식으로 영화제를 개최하는데, 지난 주부터 씨네휴 영화제라는 형식으로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되었다. 상영작 목록들 중 '로맨스'나 '알렉산드라' 그리고 '천국의 가장자리' 같은 영화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그 중 '천국의 가장자리'라는 영화가 로튼토마토 같은 곳의 평가도 괜찮아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파티 아킨 감독의 '천국의 가장자리'는 터키계 독일인인 네자트 악수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옴니버스 식 영화인데 독일과 터키를 배경으로 세 가지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에테르의 죽음', '로테의 죽음' 그리고 '천국의 가장자리'라는 세 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파티 아킨은 독일 내의 터키인들의 세대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남성 중심주의의 환경 속에서의 비극과 터키 내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의 비극 등을 '죽음'이라는 요소를 통해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에테르의 죽음'과 '로테의 죽음'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영화 속의 구성이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대비적인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초반 주인공인 네자트의 여정을 보여준 후 공산주의자들의 시위 장면을 보여주는 초반의 장면이라든지 부모 간의 갈등이 벌어지는 점,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비극이 발생한다는 점 등 장면마다 전편의 에피소드와 유사하면서도 대비적인 장면들을 보여준다는 점이 특징인데 마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삼색 시리즈를 연상시킬 정도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천국의 가장자리'는 두 편의 에피소드를 종합하고 있는데 여러 인물이 만나 죽음을 삶의 희망으로 전환하는 화합과 용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테르의 죽음'은 독일의 한 노년의 남자가 창녀촌에서 여자를 고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여자를 고르던 남자는 한 여성이 터키 말을 한다는 점을 알아채고 그녀와 정사를 나누기 시작한다. 에테르라 불리는 이 여성은 알리라는 노년의 남자와 정사를 나누면서 점점 친해지게 되고 매일 일당을 지불할테니 자신과 살자는 알리의 요청을 듣게 된다. 에테르는 그의 요구를 터무니없게 생각하지만, 독일 내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다시는 창녀로 활동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으면서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녀는 알리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주인공인 네자트는 바로 알리라는 노인의 아들인데, 독일의 대학에서 독일어 교수라는 지위를 갖춘 독일인이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고집스러운 터키인 아버지인 알리와는 많은 점에서 갈등을 겪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알리가 에테르라는 여성을 데려오면서 격화되기 시작한다.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알리는 자신의 아들이 에테르와 관계를 가졌을 거라는 의심을 하면서 아들과 에테르를 괴롭힌다. 에테르가 만든 파이를 먹지 않고 담배를 펴대는 아버지에게 분노한 아들에게 분노한 아들은 집을 나가게 되고, 알리는 에테르를 여성이 아닌 돈으로 거래한 물품처럼 대한다. 돈을 냈으니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에테르를 괴롭히자, 그녀는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술에 취한 알리는 에테르의 뺨을 때리고 마는데, 그것이 에테르의 죽음으로 연결되고 만다. 사람을 죽인 알리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알리의 아들인 네자트는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녀의 시체를 터키의 본가로 보낸 후 장사 지낸다. 네자트는 터키에서 생전에 에테르가 보고 싶어하던 딸을 찾기 위해 터키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독일인이 운영하는 서점을 인수하게 된다.
에테르의 죽음은 폭력적인 남성 우월주의 속에서 희생되는 여성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비극이 벌어진 곳은 독일이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환경은 터키의 남성우월주의가 판치는 곳이다. 에테르는 자신의 딸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독일에서 자신의 몸을 팔아 딸의 학비를 마련하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단지 보기에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녀의 매춘 행위를 비난하고 협박한다. 네자트의 아버지인 알리의 모습도 남성 우월주의가 보여주는 폭력의 대표적인 예이다. 에테르를 여성으로 대우하지 않고 물건처럼 취급하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극단적인 남성 우월주의의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로테의 죽음'은 '에테르의 죽음'과 다른 내용을 다룬 에피소드이지만 비교적 대칭적인 장면들을 전개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초반 시위 장면에서 급진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시위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프락치 같은 남자를 폭행하는 과정에서 한 시위자가 총을 입수하고 경찰은 총을 입수한 사람을 쫓기 시작한다. 총을 입수한 사람은 다름아닌 에테르의 딸인 아이텐이다. ('에테르의 죽음'을 유심히 본 분이라면 네자트가 강의를 할 때 책상에서 누워 자던 터키인 여성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고 진압하는 경찰들을 피하기 위해 아이텐은 독일로 피신하게 된다. 아이텐은 독일 내 급진주의자들과 만난 후 그들에게 빌린 돈으로 어머니인 에테르를 찾으러 구두 가게를 찾아보지만 에테르의 본 직업을 모르는 그녀는 어머니를 찾지 못한다. 돈을 빌린 에테르는 급진주의자들과 싸우게 되고 대학교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굶주린 그녀는 우연히 한 독일인 여성에게 돈을 구걸하게 되는데, 이해심 많은 독일인 여성은 아이텐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게 도와준다. 로테라는 독일인 여성은 정치적인 문제로 독일에서 방황하는 아이텐을 위해 그녀를 도와주게 되고 그 과정에서 로테는 아이텐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보수적인 로테의 홀어머니는 그녀의 딸이 연고 없는 터키인 여성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위층에서 쓸쓸하게 바라본다. 로테의 어머니와 에테르는 급기야 독일과 터키의 국제적인 관계를 두고 다투게 된다. 로테의 어머니는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하게 된다면 터키의 불안정한 정치적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에테르는 유럽연합의 주축 세력인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과거 식민지를 지배하던 제국이었다는 점을 들면서 그녀의 주장을 묵살한다. (로테의 어머니와 아이텐의 갈등은 독일로 대표되는 유럽과 터키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점이 특징이다. 유럽 연합에 속하려 하지만 그 곳에 포함되지 못하는 터키의 모습과 터키 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박해나 인권 탄압을 남의 일처럼 무관심하게 생각하는 유럽 국가의 방관적인 태도가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아이텐은 로테의 집을 나가 어머니를 찾기로 결심하고 로테의 도움을 받아 그녀와 함께 여정을 떠난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불법체류자인 아이텐이 고속도로에서 잡히게 되고, 아이텐의 망명 신청에도 불구하고 터키의 정치체재는 그녀의 목숨을 해칠 만큼 위협적이지 않다는 독일 법원의 판결로 그녀는 터키로 강제출국 된다. 연인인 아이텐이 터키로 출국되자 로테는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홀연 단신으로 터키로 떠난다.
로테는 정치범으로 교도소에 갇힌 아이텐을 출소시키기 위해 혼자 힘으로 노력해 그녀와 면담을 갖는데 성공하지만, 아이텐이 건네준 쪽지가 그녀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이끌어 낸다. 총을 가진 사실을 안 급진주의자 동료가 아이텐에게 총의 위치를 말할 것을 요구하고, 그들에게 억눌리고 있던 아이텐이 그녀의 연인에게 총을 갖고 오라는 무리한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 로테는 총을 찾아내지만 소매치기에게 그녀의 핸드백을 빼앗기게 되고, 애써 핸드백을 찾던 로테는 어이없게도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로테의 죽음 후 영화는 감옥에 갇혔던 네자트의 아버지가 터키로 강제출국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다.
'천국의 가장자리'는 터키로 강제 출국된 네자트의 아버지와 딸의 유품을 찾기 위해 터키로 온 로테의 어머니가 공항에서 수속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호텔 방을 아래로 내려다 보는 카메라와 장면들의 전환을 통해 로테의 어머니가 딸을 잃은 슬픔을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는 모습부터 커튼을 잡으며 격한 슬픔과 통곡을 토해내는 어머니의 간절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네자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 서점에 차마 들르지 못하고 테이블에 홀로 앉아 아들이 준 책을 읽으면서 뒤늦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로테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머물던 하숙집의 주인인 네자트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딸의 유품을 찾게 된다. 로테의 어머니는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들을 만지면서 그녀를 그리워 하는데 로테가 남긴 마지막 글들을 읽으며 잠이 든다. 잠이 든 후 로테의 어머니는 자신의 앞에 있는 로테를 보고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지만 그녀가 본 것은 환영이었다. 환영을 향해 손을 내민 어머니의 안타까운 심정이 절실히 느껴진 장면이었다. 딸의 환영을 본 로테의 어머니는 점점 안정을 되찾게 되고 네자트의 하숙집에 좀 더 머물기로 결심한다.
네자트의 하숙집에 머물면서 로테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든 아이텐에 대한 적의나 분노를 떨쳐낸다. 교도소에서 자신을 만나러 온 로테의 어머니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죄를 사죄하지만, 로테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든 아이텐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녀를 마치 딸처럼 여기면서 아이텐을 용서한다. 아이텐은 로테의 죽음을 사죄하기 위해 자신이 가담한 정치조직을 배신하는 희생을 치르고 교도소를 나오게 된다. 네자트의 서점에서 로테의 어머니와 만난 아이텐은 다시 한 번 용서를 하게 되고 서로를 껴안으며 서로의 과오를 용서한다. 한편 네자트는 로테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의 자식을 제물로 바칠 뻔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계기로 아버지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만약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아무리 신이라도 내 자식을 바치라면 싸울 것이다'라고 답한 아버지의 말을 기억해 낸 네자트는 살인범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걷어내고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 먹는다. 로테의 어머니에게 서점을 맡긴 후 네자트는 아버지가 살던 고향을 향해 여정을 떠난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네자트는 해변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데, 클로즈업된 네자트의 표정을 보여준 후 해변의 모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네자트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마무리한다.
클로즈업된 화면 속에서 보여진 네자트의 표정은 천국의 가장자리를 발견한 모습같이 느껴진다. 파티 아킨이 말하는 '천국의 가장자리'에 대해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가 의도한 천국이라는 곳은 수직적인 하늘이 아닌 수평적인 바다처럼 바로 우리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 상대방이 아무리 끔찍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그에 대한 참회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 함께 했을 때 바로 천국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한편 '천국의 가장 자리' 속의 모습은 신구 간의 갈등과 가족의 갈등, 그리고 터키와 유럽 간의 갈등의 봉합을 보여준다. 네자트와 그의 아버지, 로테와 그녀의 어머니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성격으로 크게 다투고 서로를 경멸한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참회하며 용서한다. 네자트의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뒤늦게 참회하며 그의 아들은 네자트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깨닫고 그를 용서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로테의 어머니는 로테가 한 연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후에야 딸의 고뇌를 이해하고 그녀 대신 아이텐을 구출하고 아이텐을 딸처럼 받아들인다. 각 인물들의 참회와 용서 그리고 박애가 바로 현실 속의 천국의 모습인 것이다. 한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로테의 어머니와 네자트의 모습은 터키와 유럽이 서로 다른 문화권이 아닌, 같은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살아가는 같은 공간임을 암시한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기독교의 성서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코란에서도 제시된 내용이다. 신이라는 존재가 하나님과 알라라는 차이를 제외하고는 틀린 점이 없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터키가 유럽과 동떨어진 곳이 아닌 똑같은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사는 곳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ps. 영화에서 네자트의 아버지가 보는 책 이름이 자막으로 나오지 않아서 무슨 책인지 궁금했는데, 네이버 블로거 분이 정리한 글이 있어서 덕분에 무슨 책인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