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사요나라 나의 청춘(소라닌, 201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지캉과 미야자키 아오이의 조합이라
개봉 전부터 무척이나 보고 싶던 영화였다.
만화 원작은 보지 않았지만 아마 굳이 찾아보지는 않을 듯 싶다.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 걸까?'
그 대답 가운데 하나가
밝거나 어둡거나 즐겁거나 슬프거나 한 그런 청춘물일 것이다.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힘들게
또 뜨겁고 눈부시고 아스라하게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된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결코 똑같은 모습인 것은 아니다.

내 시대의 청춘에서
이제 난 아직 스포츠가 돈이 되기 전의 열기가 담긴
<슬램덩크>의 땀냄새를 맡지만,
21세기의 청춘은 <소라닌>에서처럼
평범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꿈꾸고 싶은
아마추어 밴드의 기타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지는 않았지만 쟈니스가 나오는 이와이 슌지의 <밴디지>는
성공한 아저씨의 청춘 회고록에나 어울릴 시대와 뒤떨어진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패전 이후 그리고 전공투의 실패 이후
일본의 청춘들은
사회구조, 이념, 전쟁이나 정치 투쟁에 휩싸여 '전체'를 우선할 필요가 없이
그저 앞을 향해 '자신의 삶'에 충실한 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연장선에 회사가 있고, 아마도 가족과 마을이라는 공동체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품 경제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하루키가 보여주는  가난이 사적이고 인생의 한 시절인 시대는 사라져버렸다.
이제 일본의 청춘들은 전 세계 여느 젊은이들과 똑같이
세계적 경제 불황과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를 손에 쥐게 되었다.

<소라닌>은 아마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일본 청춘이 어렵게 낸,
힘들게 한 발자국을 디딘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의 답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다시 한번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힘겹게, 아주 힘겹게 선택한다.

이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한국의 청춘물이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아이가 재빨리 어른이 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정이 생략된 채 되어버린 어른이
과정을 거쳐 어렵게 어른이 된 사람들과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살이 한국 사회의 문제라면
히키고모리는 일본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스트레스로 어딘가 크게 망가진,
그래서 메이코의 "독이 쌓인다"는대사가 인상적이었던 나에게
잊어버렸던 지난 날의 쓰라린 청춘 한 조각을 떠올리게 한
영화 속 청춘들의 열정과 사랑, 좌절과 실패가 보는 내내 몹시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