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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arthouse모모

[엉클 분미] 영화적 충만함으로 가득한 동시대의 걸작


엉클 분미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2010년

전생, 지역성, 영화라는 세 가지 테마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관습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영화문법, 그 독특한 형식 속에 담아낸 세상을 사유하는 남다른 태도로 일찌감치 ‘시네아스트’라는 칭호를 얻은 작가다. 이는 곧 그의 영화가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험영화에 가까운 그의 작품은 대부분 낯설고 모호한 분위기의 열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엉클 분미>는 전작들에 비해 한결 명확해진 서사의 흐름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영화는 명확한 주제를 전하기보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며 관객 스스로 영화와 교감하기를 바라고 있다.


영화는 ‘전생을 기억하는 엉클 분미’라는 원제처럼 전생의 기억을 지닌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분미는 오랫동안 앓아온 신장 결석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여생을 보내기 위해 자신을 보살펴온 처제와 친한 청년과 함께 시골을 찾은 분미는 그곳에서 오래 전 죽은 부인과 종적을 감춰버린 아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무성한 숲을 지나 길고 긴 동굴을 향한 여정을 떠난다. 그 여정의 끝에서 분미는 자신의 전생을 떠올리며 또 다른 삶이 펼쳐질 죽음을 맞이하고, 남겨진 사람들은 다시 그들의 삶으로 돌아간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이번에도 <엉클 분미>를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보게끔 만든다. 제목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전생에 대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독특한 세계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엉클 분미>에서 전생은 단순히 태어나기 이전의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의 반복이며, 인간은 물론 동물과 식물을 아우르는 생명의 의미이자, 보편적이면서 우주적인 범위의 삶을 뜻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무엇이 분미의 전생인지를 영화 속에서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분미의 전생은 오프닝에 등장하는 소일 수도 있고, 끊임없이 등장하는 원숭이 괴물일 수도 있으며, 중간에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공주 이야기의 한 등장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엉클 분미>에서 전생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다른 존재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지금과 평행한 시간대에서 또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

그럼에도 전생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도 전생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흔적만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을 뿐이다. <엉클 분미>는 이러한 개인의 삶을 사회적인 범위까지 확장시킨다. 여기서 영화의 배경이자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어릴 적 자라난 곳이기도 한 태국 북동부 지역의 정치, 역사적 상황이 영화에 개입된다. 이곳은 오래 전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을 겪어야 했던, 깊은 상처가 남겨져 있는 곳이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어떤 이들은 숲으로 숨어들어야만 했고, 분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쫓아 숲으로 들어가 때로는 이들을 죽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든 원숭이 괴물은 곧 이곳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상처를 상징하는 은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가듯, 사회도 과거의 역사가 남긴 상처는 돌아보지 않는다고 <엉클 분미>는 넌지시 이야기한다. 전생처럼 과거 역시 망각되고 있을 뿐이다.

망각되는 기억들. 그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이자 <엉클 분미>를 통해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둔 분미는 마치 자궁을 거슬러 올라가듯 올라온 깊숙한 굴의 끝에서 마침내 마지막 이야기를 건넨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던 분미는 그 기억 속에서 꾸게 되는 꿈의 이야기를 전한다. 가까운 미래에 과거의 인간을 사라지게 만드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그 과거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스크린에 빛을 비춰야 한다는 이야기는 영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영화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동시에 관객에게 던진다. 영화는 왜 존재하느냐는 질문, 그리고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통로라는 대답. 혹은 과거를 위해 존재하는 최소한의 장치라는 대답. <엉클 분미>는 영화에 대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고민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전생, 지역성, 영화라는 테마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직접 연출의 변을 통해 밝힌 연출 의도이기도 하다. 어떤 관객은 이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엉클 분미>가 어떤 한 가지 의미나 주제로만 관객들과 대화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을 뿐이다. <엉클 분미>의 놀라운 점은 이러한 방식이 기존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감흥을 낳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관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만든 영화와 교감하는 순간의 그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감히 ‘새로운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엉클 분미>는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다. 영혼은 천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 동물이나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죽은 아내의 말에 분미는 말한다. “그럼 나는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당신을 만날 수 있지?” 그 마지막 포옹의 순간은 그 어떤 멜로영화보다도 로맨틱하다. 원숭이 괴물들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어두운 숲의 이미지, 그리고 마치 우주에 온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드는 굴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그 어떤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밀도 높은 감성이 배어 있다. 이런 아름다움은 보통의 영화에서는 만나보기 힘들다. <엉클 분미>는 오직 스크린만을 통해 관객과 대화를 나눈다. <엉클 분미>는 영화적인 충만함으로 가득한 동시대의 걸작이다.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