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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Mood For Music :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어떤 음악적 풍경

In The Mood For Music :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어떤 음악적 풍경

 

두말 할 것 없이, <셰임>은 표현의 수위를 놓고 볼 때 도발적이고 치명적인 19금 영화의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사회를 나서는 관객들은 입을 모아 이 영화의 황량함, 슬픔, 출구 없는 고독감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셰임>은 이렇듯 보는 이에게 감정적인 반향을 남기는 것일까? 물론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마이클 파스벤더의 신들린 듯한 연기가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힌트가 있다. 영화음악 마니아라면 필사적으로 소장해야 할 보석 같은 OST가 바로 그것이다.

 

 

 

<중경삼림>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같은 영화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한 가지는 듣는 이를 취하게 만드는 음악일 것이다. <셰임>의 섹스중독의 양상은 <중경삼림>의 애정결핍적 상사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알코올 중독과도 일맥상통하는 도시병이고 현대병이다. 어지럽게 반짝이는 거대도시의 불빛 안에서 고독한 주인공들의 말이나 행동보다 그들의 마음을 더 잘 투영하는 것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음악들이다. 혹은 라디오나 LP판에서 흘러나오기도 하고 혹은 주인공들의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기도 하는 그 음악들은, 관객을 순식간에 영화의 무드 안에 편입시키고 주인공들과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셰임>의 음악들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뉴욕이라는 도시만큼이나 다채로운 프리즘을 드러낸다. 괴짜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특유의 낮은 허밍과 함께 들려주는 바흐에서부터, 윤기있는 쳇 베이커의 목소리가 몸을 나른하게 하는 달콤쌉싸름한 재즈곡, 저절로 춤추고 싶게 하는 Chic의 전설적인 디스코곡에서부터 50인의 현악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오리지널 스코어에 이르기까지, <셰임>의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배우들의 언어이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내레이터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주인공 브랜든은미래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60년대의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답한다. 많은 것을 시사하는 이 대사에서 느껴지듯이, <셰임>의 음악은 말보다 더 솔직한 어떤 내면의 풍경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Brandon (Harry Escott 작곡)

“영화의 처음과 끝에 (작곡가) 해리 에스코트의 곡을 넣은 것은 아주 스릴 넘치는 경험이었다. 내가 음악을 통해 그려내고 싶었던 두 가지는 열정갈망이었다..”

- 스티브 맥퀸 감독 인터뷰 중에서 -

 

영화 도입부에는 수많은 평론가가 찬사를 보낸 명장면이 등장한다. 지하철 안에서 마주 보고 앉게 된 브랜든과 낯선 여성. 몇 개의 제스처와 시선의 교환, 교차편집만으로 기가 막힌 에로티시즘을 구현한 이 장면에서, 화면 위로 낮고 풍성하게 깔리며 느리게 움직이는 50인조 현악 오케스트라의 오리지널 스코어 ‘Brandon’은 뉴욕 지하철의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풍경 위에 놀라운 서정성을 유발한다. 스티브 맥퀸은 단 몇 분 만에 뉴욕이라는 도시를 우리에게 묘사해 보인다. 소통불능의 대도시에서 감정은 거짓되고 아무도 진정으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Brandon’은 스케일 큰 작품의 서곡이면서 동시에 브랜든의 뿌리 깊은 고독감을 그려내는 영화의 밑그림이다.

해리 에스코트의 오케스트라 넘버는 겹겹이 내려앉는 묵직한 현악기의 음률로 이 영화의 애수와 훌륭하게 어우러진다. 몇몇 장면들에서는 놀라운 드라마틱 효과를 부여하며 영화에 많은 서정성을 부여하면서도 어떤 순간엔 차가움마저 느껴지게 한다.

 

Genius of Love (Tom Tom Club)

성공한 뉴요커 브랜든은 일을 마친 후 여피족들이 즐겨찾는 바에 동료들과 둘러앉아 처음 본 여자들에게 접근하는 사교생활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서툴게 접근하는 직장상사 데이빗과, 말을 아끼며 세련된 매너로 호감을 사는 브랜든의 모습이 대비되는 장면에서 80년대를 풍미한 펑크밴드 톰톰클럽의 댄스 넘버 ‘Genius of Love’가 흥을 돋운다. 머라이어 캐리의 ‘Fantasy’를 비롯, 수많은 곡에 샘플링 되어 삽입된 곡. 음악이 자연스럽게 블론디의 ‘Rapture’로 바뀌면서 데이빗이 여성에게 춤을 청한다.

 

Rapture (Blondie)

70~80년대 펑크록 그룹 블론디의 ‘Rapture’. 몽환적인 가사도 역시 바에서 정신을 몽롱하게 할 정도로 춤과 인스턴트 만남을 즐기는 사람들의 환각상태에 가까운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발표당시 팝차트 1위에 오른 최고의 히트곡으로서, 극장판 <섹스 앤 더 시티2>에서 알리샤 키스가 리메이크해서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기도 했다.

 

I Want Your Love (Chic)

댄스음악의 기념비적인 앨범 ‘C’est Chic’(1978년 발매)에 실린 곡으로서 당시 미국 빌보드 톱 10 싱글에 올랐다. 디스코 밴드로서 모던 댄스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이들의 최면적이면서도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하는 듯한 그루브는 잠시 전 바에서의 분위기가 브랜든의 아파트로 옮겨 온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이 곡은 이 영화에서 브랜든의 집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씨씨의 존재를 예고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곡이 영화에 개입하는 방식은 너무나 완벽해서 유쾌할 정도이다. 인물들의 긴장된, 혹은 격앙된 모습위로 아랑곳 않고 흐르는 흥겨운 비트와 감각적인 멜로디는 두 남매의 말다툼 장면 내내 볼륨을 낮추지 않은 채 참견하듯 개입하며 브랜든의 일상이 통제불능의 어떤 낯선 리듬(씨씨)에 휩싸이게 됨을 암시한다.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의 가사 또한 씨씨의 캐릭터를 잘 반영한다.

한바탕 싸우고 난 후 브랜든은 지친 표정으로 씨씨가 걸어놓은 이 곡의 LP판을 끈다. , 브랜든이 소장하고 있는 음악이었던 것. 아마도 어린 시절 씨씨와 춤추던 추억이 담긴 곡은 아니었을까.

Chic ‘I want your love’는 내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집을 비웠을 때 내 여동생과 춤추곤 했던 곡 중 하나다. 우리는 볼륨을 엄청나게 높여놓곤 했다. (…) 씨씨라는 캐릭터가 우리를 그녀에게 소개하기 위해 노래할 법한 곡이다. 브랜든이 안으로 붕괴하는 인물이라면 씨씨는 외부로 폭발하는 날것같은 정열이 가득하다.  ‘I Want Your Love’라는 제목도 씨씨만큼이나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듯한 느낌이다.”

- 스티브 맥퀸 감독 인터뷰 중에서 -

 

My Favorite Things (John Coltrane)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이 들려주는 부드러운 음색의 정통재즈는 톰톰클럽과 블론디에 맞춰 춤추는 시끄러운 바와는 또 다른 고급 클럽을 배경으로 뉴욕의 밤풍경을 그려보인다. 여기서도 여전히 천박한 말과 행동으로 웨이트리스들을 유혹하기에 몰두하는 직장상사 데이빗과 달리 브랜든은 재즈 분위기에 어울리는 쿨하고 매너있는 태도를 보이며 조금은 센티멘털한 분위기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OST로 태어난 원곡의 기분 좋게 흔들리는 리듬과 멜로디를 재즈의 어법으로 풀어낸 콜트레인의 색소폰은 세련된 즉흥연주와 싱코페이션으로 가득하다. 유희적인 분위기로 긴장을 풀어주며 듣는 이를 기분좋게 나른하게 하는 한편, 곧 시작될 씨씨의뉴욕 뉴욕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대비한다.

 

New York, New York (Carey Muligan)

<셰임>에는 잊지 못할 명장면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씨씨가 뉴욕의 한 클럽에서뉴욕 뉴욕을 부르는 부분이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씨씨, 혹은 지금 가장 핫한 여배우 중 하나인 캐리 멀리건(<드라이브>, <언 에듀케이션>, <위대한 개츠비>)은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될 것이다.

뮤지컬 <시카고> <카바레>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존 칸더(John Kander) - 작사가 프레드 엡(Fred Ebb) 콤비가 쓴 원곡뉴욕 뉴욕은 본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77년 영화 <뉴욕 뉴욕>의 주제곡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음악이 유명해진 것은 2년 뒤 프랭크 시나트라가 다시 불렀을 때이다. 노래의 유명세 덕분에 영화까지 재발견된다. 하지만 이 곡의 원형은 영화에 삽입된 라이자 미넬리의 버전이다. 영화 <그렘린>에서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르>까지 수많은 영화에 의해 차용되어 온 이 곡은 흔히,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을 상징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주제가처럼 쓰여왔다. 뉴욕 양키스는 홈구장에서 경기가 있는 날에는 모든 관중이 떠날 때까지 이 노래를 반복해서 트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결혼식이나 중요한 행사에서 가장 많이 들려지는 노래로 이 노래가 얼마나 많은 뉴요커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퀸, 비욘세, 마이클 부블레 등 수없이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한 도시에 대한 이러한 음악적 클리셰는 캐리 멀리건과 스티브 맥퀸 감독에 의해 조금 낯선 버전으로 재창조된다. 스탠다드 재즈인 원곡은 블루스풍으로 편곡 되었고, 씨씨라는 불안정한 캐릭터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심리적인 면면들이 이 곡을 통해 그려진다. 연약하고, 관능적이고, 감수성은 극도로 예민하며, 마치 방향을 잃은 듯한 씨씨에게 이 도시는 너무나 버거운 곳일 뿐이다.

노래 가사는 낙천적인 내용이지만, 씨씨의 노래에는 눈물이 터지기 직전의 처연함이 묻어 있다. 가사가 말하는 내용과 노래가 전달하는 정서 사이의 불일치는 보는 이에게 비극을 예감하게 한다. 그렇게 이 곡은 영화 안에서 숭고함을 덧입는다. 한 해외언론(프랑스판 프리미어)은 이 노래에 대해, 씨씨 캐릭터에게 있어선 (죽기 직전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백조의 노래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평한다.

캐리 멀리건은 가끔 제 음을 벗어나기도 하며, 박자 역시 자유롭다. 또한 아카펠라에 가깝게 연출된 이 노래는, 보컬에 덧씌운 흔한 에코 효과도 녹음실의 후반작업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피아노 반주가 있는데도 그것과 맞춰가기 보다는 씨씨 혼자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후반작업에서 일체의 편집을 금했다는 후문이다.

브랜든 역의 마이클 파스벤더는 본촬영 때 멀리건의뉴욕 뉴욕을 처음 들었다고 한다. 영화에 보이는 브랜든의 표정은 그 노래를 듣는 파스벤더의 실시간 감정의 기록이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이 장면이, 관객이 이 영화에 진정으로 몰입하게 되는바로 그 순간이 되기를 바라며 촬영했다고 전했다. 새롭게 해석되어 영화에 감동을 더하는 전설적인 재즈곡과 배우들의 명연기가 창조하는 예술적 시너지를 목격하는 것도 이 영화 감상의 백미.

“캐리가 이 곡을 브랜든에게 들려주기 위해 눈물이 터지기 직전에 자신을 억제하는 모습은 놀라웠다. 그 감정의 깊이를 모든 이가 클로즈업으로 보게 된다.”

“시나트라와 미넬리가 부른 노래는 매우 대담하고 멋들어진다. (그런데) 사실 이 노래는 무언가를 축하하는 노래가 아니라 매우 슬픈 노래다. 이 사람은 꿈을 가지고 이 도시에 왔으나 아직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 이 노래를 통해 브랜든과 씨씨가 공유하고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씨씨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듣는 브랜든의 반응을 살펴 보면 아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 순간 추상적으로 관객들은 브랜든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다.”

- 스티브 맥퀸 감독 인터뷰 중에서 -

 

Let’s Get Lost (Chet Baker)

‘뉴욕 뉴욕무대를 마친 씨씨가 브랜든과 데이빗의 테이블에 합류하고, 실없는 대화들을 통해 씨씨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보들이 무심하게 던져진다. 브랜든의 불안한 듯 염려하는 표정은 안 보이기라도 하는 듯, 씨씨와 데이빗은 가벼운 연애에 기꺼이 동참하며 샴페인을 청한다. 쳇 베이커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경쾌한 피아노와 밝은 트럼펫 소리와 어우러져 마치 샴페인 기포처럼 즉흥적인 연애의 기운을 돋운다.

 

You Can’t Be Beat Howlin’ Wolf)

Howlin’ Wolf의 격렬한 블루스곡. 갈등과 혼란에 방황하는 브랜든이 싸구려 술집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장면의 음악. 거칠고 폭력적인 에너지가 제멋대로 분출하는 장면. 이성을 잃은 브랜든은 평소 철저하게 분리하며 지내왔던 두 개의 자아가 마구 뒤섞이는 듯, 이 곡은 화면의 교차편집과 함께 애상적인 현악 오케스트라 곡 ‘Unravelling’(‘Brandon’의 변주)과 교차하며, 혹은 겹쳐지며 들려온다.

 

Unravelling’ (Harry Escott 작곡)

영화에서 성적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쓰리섬 장면은 싱가포르에서 작품 상영금지를 초래할 만큼 선정성의 수위가 높은 장면. 그러나 이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선정성 그 너머의 어떤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정서적 효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배경음악이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인물과 뒤섞이듯 생생하게 찍힌 이 쓰리섬 장면의 오디오트랙에는 음란한 신음소리도 격정적인 외침도 없다. 단지 영화초반에서 브랜든의 테마로 쓰였던 현악 오케스트라 스코어의 아름답고 슬픈 변주, ‘Unravelling’이 애수를 가득 띤 채 화면을 뒤덮고 있을 뿐이다. 성적 타락의 극단에 있는 브랜든의 모습이 차라리 고통스럽고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파스벤더의 정제된 표정연기와 이 신비롭고 엄숙한 비가(悲歌)의 조합 때문일 것이다. 관객들은 브랜든의 내면의 지옥을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그 고통에 감정이입하게 된다.

영화 초입에서 브랜든의 테마로 쓰였던 ‘Brandon’이 낮게 깔리는 우울한 우아함이 지배적이었던 것에 반해, 그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는 ‘Unravelling’은 섬세하고도 애절하게 도약하고 비상하며 가슴을 저미는 슬픔과 고통의 정서의 극치까지 관객을 이끌어간다. 마치 깃털이 내려 앉듯 섬세하고 느리게 마무리되는 이 곡의 마지막에는 일종의 고해성사의 마무리, ‘아멘에 가까운 정제된 마침표가 찍히는 듯하다.

 

The Problem (Mark Louque)

원래는 뉴욕 패션위크의 런웨이 쇼를 위한 배경음악 작곡가였던 DJ Mark Louque가 만든 이 넘버는 펑키하고 들뜬 분위기로서 해리 에스코트의 스코어들과 큰 대조를 보인다. 브랜든이 이리저리 타락의 장소들을 돌며 방황하는 장면들에서 몽환적인 분위기 음악으로 쓰이며, ‘You Can’t Be Beat’와 마찬가지로 ‘Unravelling’과 겹쳐지며 브랜든의 자아가 엉망으로 뒤엉키고 있음을 표현한다.

 

Glen Gould의 곡들

“글렌 굴드를 처음 발견한 것은 청소년기의 마지막 무렵이다. 비틀즈를 발견했던 것처럼,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듯이 느껴졌다. 매우 친숙하게 들리면서도 동시에 전혀 들은 적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너머의 인생에 대한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듯한 신선함이 있었다. (…) 마치 그가 연주할 때 가지고 다니는 의자처럼, 일종의 망가진 우아함 broken elegance, 극도로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들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것이 Shame OST의 중추이고 브랜든의 캐릭터가 가진 아주 개인적인 어떤 부분이다. 나는 그가 음악과 맺고 있는 관계가 손에 잡힐 듯이 물리적인 어떤 것이 되길 원했기 때문에 그가 LP판을 듣는 것으로 설정했다.”

- 스티브 맥퀸 감독의 인터뷰 중에서 -

 

이 영화에서 브랜든이라는 인물이 가진 외설취미와 클래식 애호라는 양면성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분리되기보다는 동전의 양면처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며 얽히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몇 번인가 음악이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이야기를 끌고 가는 순간이 있다. 모든 충동과 저열함과 타락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음악은 조화와 아름다움과 평안이 있는 곳으로의 탈출을 (일시적이나마) 돕는다. 이런 기능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글렌 굴드라는 기이한 천재가 들려주는 바흐의 곡들이다.

-       Aria (From the Goldberg Variations)

피아니스트 특유의 낮은 허밍소리가 그대로 녹음된 이 넘버는 브랜든의 평안한 저녁시간을 함께 하는 동반자와도 같다. 테이크아웃 음식을 풀어놓으며 노트북을 켜기 전, 브랜든은 바흐를 듣는다. 그리고는 노트북을 통해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한다.

-       Prelude & Fugue No. 10 in E Minor, BWV 855

여동생의 난잡한 행동을 보고 들어야 하는 괴로움에서 벗어 나기 위해 MP3 플레이어로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들으며 뉴욕의 밤거리를 달린다. 굴드 특유의 스타카토로 이어지는 피아노의 음들은 조깅하는 브랜든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춘다.

-       Variation 15 a 1 Clav. Canone alla Quinta (Andante from the Goldberg Variations) (1981 Version)

데이트 신청을 받은 브랜든이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기 전 강변과 거리를 서성이며 망설이는 모습으로부터 데이트 장소까지 이어지는 음악. 안정되고 정상적인 관계를 앞에 둔 마음은 착잡하고 무겁다는 것을 표현하듯이 우울한 정서를 띤다.

-       Prelude & Fugue No. 16 in G Minor, BWV 885

영화 후반, 불안감에 휩싸인 브랜든은 서둘러 집으로 달려간다. 이 때부터 시작된 프렐류드와 푸가는 참혹한 씬 내내 무심히 계속된다. 소리치며 울부짖는 브랜든의 목소리는 소거되고 바흐의 피아노곡만이 영상 위로 흐른다. 이 장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고는 낮게 허밍하는 글렌 굴드의 목소리뿐이다.

글렌 굴드 또한 그 자신 평생을 고독 속에서 살며 음악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인 기인 천재이다. 그가 만들어 내는 소리는 새롭고 낯설었지만 굴드 만의 섬세하고 인간적인 바흐,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바흐를 들려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브랜든의 굴드 취미는 문화적 허세이거나 음란함에 대한 변명이라기 보다는 브랜든 내면의 더 깊은 자아에의 울림이었을 것이다.

 

End Credits (Harry Escott 작곡)

마치 브랜든의 자아가 글렌 굴드를 꿈꾸는 듯한, 브랜든의 테마와 피아노의 결합. ‘Brandon’ ‘Unravelling’에서 현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멜로디를 쓸쓸한 피아노 솔로 버전으로 연주하며 영화를 맺는다. 스케일 크고 웅장한 오케스트라 버전보다 개인적이고 내밀하며 감상적인 이 간결한 연주는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슬픈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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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수위만으로도 수많은 나라에서 개봉과 관련한 스캔들을 일으킨 <셰임>이지만 그렇다고 맥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의도한 것이 센세이셔널리즘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섹스중독자의 24시간을 그려내는 방식은 동정이나 연민보다는 객관적이고 임상적인 관찰에 기반하고 있다. 대신 감정적인 판단의 몫은 관객에게 맡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음악들은 어찌보면 맥퀸 감독이 은근슬쩍 내비치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관객들은 흐르는 음악에 동화되며 브랜든과 씨씨의 내면의 풍경을 더 이해하며 감정이입하게 되고, 섹스중독 너머에 있는 더 근원적인 고독을 이해하게 되니 말이다.

흔히 영화 OST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를 때는 그저 종합선물세트처럼 되어 영상 및 스토리와의 유기적인 어울림을 바라기 힘들거나, 클래식한 무게를 가진 스코어들은 단순한 인용 이상의 미덕을 발휘하기 어려워 지기도 한다. 그러나 <셰임>의 경우, 각각의 곡들의 사용은 담백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인물과 스토리와 상황에 가장 효과적인 형태로 개입함으로써 영화의 강렬한 톤과 고독한 정서를 극대화하고 있다.

<중경삼림>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같은 영화들은 영화와 잘 어우러진 음악이 어떻게 한 편의 영화를 잊지 못할 정서적 체험으로 만드는가를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셰임>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관객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