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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하얀 성 (Beyaz Kale)

하얀성(이난아 역) 상세보기
오르한 파묵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미스터리적인 긴박한 스토리와 풍성한 언어를 조화시키며 존재의 심오한 성으로 환상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터키 유명 작가 오르한 파묵 신간. <혹서>, <새로운 인생>, <내 이름은 빨강> 등을 발표하며,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작가가 이번 소설을 통해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펼쳐나간다. 배가 해적에게 습격당해 터키 술탄의 노예가 된 '나'. 거기서 뜻하지 않게 자신과 똑같은 모


베네치아 출신인 한 남자의 독백으로 서술되어 있는 '하얀 성'은 해적선에 납치된 이탈리아 인이 오스만 투르크에서 지낸 세월의 이야기 이다. 마치 배가 난파되어 일생을 조선에서 살아간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 같은 남자의 이야기 같지만, '하얀 성'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서양인이 낯선 동양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을 진술하기 보다는 서양인이 오스만 투르크라는 생소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보는 듯한 남자를 만난 소감을 서술한다는 점이다. 즉, '하얀 성'은 도플갱어 같은 또 다른 자신을 오스만 투르크에서 만나게 되면서 그와 겪은 인생의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다.

자신을 의사라고 속여 간신히 노예생활을 벗어난 주인공은 호자(선생을 의미하는 말)라는 터키인을 만나면서 그가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정작 호자라는 사람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종교를 이슬람교로 개종하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은 주인공은 목숨을 건진 대신 호자의 노예가 된다. 천체의 움직임 같은 과학에 관심이 많던 호자는 주인공에게 질문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향수병으로 고통받고 호자의 고상한 태도에 거부감을 느낀 주인공은 호자를 지배하기 위해 그의 성격을 조종한다. 호자는 호자대로 그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용하기 위해 주인공을 괴롭히게 된다. 이처럼 두 인물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는데, 이같은 갈등은 자신의 자아 찾기라는 기묘한 행위를 통해 분출된다. 주인공은 호자에게 자신에 대한 글을 써 다른 사람과 다른 자신만의 자아의 정체성을 찾을 것을 충고하면서 자신에 대한 글을 쓸 것을 제안한다. 호자는 자신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대한 분노로 자신이 쓴 글을 여러 차례 찢어낸다. 자아 찾기라는 행위를 통해 호자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주인공은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죽음을 두려워 하기 시작한다. 호자는 흑사병이 창궐하자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흑사병을 두려워 하는 주인공을 비웃는다. 호자는 주인공이 자아찾기 행위를 제안 했던 것처럼 자신의 반점을 이용해 주인공도 자신과 같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를 옷벗기고 같이 거울에 서서 서로의 몸을 훝어보게 한다.

서로의 자아 찾기 행위는 각각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행동이지만 이같은 행동들을 통해 그들은 점점 서로의 자아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던 두 인물들은 마치 자신의 분신을 보는 것 같은 행동을 하면서 서로 협력하게 된다. 흑사병을 막기 위해 황제인 파디샤가 호자를 부르자 호자는 주인공과 함께 흑사병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호자는 황제에게 자신의 계획을 시와 그림으로 설명하는 동안, 주인공은 사망자의 지역별 추이를 분석하면서 흑사병 예방을 분석하면서 서로 협력한다. 결국 흑사병이 물러나자 수 년간 황제에게 자신의 과학적인 재능을 선보이길 희망하던 호자는 황실 점술가로 임명된다. 주인공은 멀리서 그의 성공을 바라보지만 호자의 성공을 마치 자신의 성공처럼 여기고 그와 같은 위치에 서서 같은 영광을 누리길 바라게 된다. 이같은 주인공의 열망은 파디샤의 꿈을 호자와 함께 해석하게 되면서 실현된다.

하지만 호자가 황실 점술가가 된 이후로 호자의 포부는 점점 실현되기 힘들게 된다. 오직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자부심만 있었지, 황제에 대한 아첨같은 정치감각이 전혀 없던 호자는 점점 황실에서 멀어져 간다. 반대로 우연한 계기로 파디샤의 눈에 띈 주인공은 파디샤의 총애를 얻으며 황실에 자주 출입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자는 황실에서 멀어지게 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적들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의 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한편 주인공은 호자 대신 그의 자리를 대행하게 되면서 향략에 빠져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서로에게 공통점을 발견하고 같이 행동하면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왔던 두 남자는 점점 자신들의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결국 파디샤가 폴란드의 한 성을 침략하게 되자 호자는 자신이 만든 무기를 선보여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호자가 만든 무기는 전혀 실효성이 없는 무기이다.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던 호자는 슬라브 족 마을을 들르면서 자신이 했던 자아찾기 행위를 마을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그들에게 숨겨진 과거를 말하도록 윽박지르게 하던 호자는 이들로부터 아무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그가 만들어낸 무기가 실전에 아무런 효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최후를 각오한 남자의 마지막 오기처럼 자신의 무기를 끌고 간다.

호자의 주인공의 꿈의 좌절은 파디샤가 점령하고자 하는 폴란드의 하얀 성으로 형상화 된다. 어떤 위협에도 끄떡없는 하얀 성의 모습은 결국 실현 불가능한 호자와 주인공의 꿈을 깨닫게 하는 장벽과 같은 것이다. 결국 무기의 효용을 증명하지 못한 호자는 죽음을 각오한 체 황제의 막사로 들어가고, 황제의 막사에서 나온 호자는 주인공의 물품과 자신의 물품을 교환하면서 서로의 인생을 교환하기로 결심한다. 호자는 주인공의 물품을 갖고 다른 세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주인공은 호자의 자리를 대신해 황제의 측근이 된다. 세월이 흘러 주인공은 황제의 점술사 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가정을 이룬 후 평온한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자신의 또 다른 자아와도 같은 남자였던 호자를 그리워 한다. 노년이 된 주인공 앞에 나타난 한 남자와의 대화는 이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마도 한 때 호자였던 남자와 주인공의 재결합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년의 주인공 앞에 나타난 여행객이 주인공이 쓴 회고록을 읽으며 서로의 감정을 재확인하는 과정은 마치 오래된 벗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