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카운터페이터> 무엇이 당신 모습입니까?

<카운터페이터> 무엇이 당신 모습인가요?

"살리 소로비치", 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에 살고 있었던 유태인.

등장인물에 대한 한 줄 소개 만으로도 이 영화에 대한 대략의 그림이 그려진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유태인(혹은 가족)->2차 세계 대전의 발발->나치의 광기->홀로코스트->유태인들의 고난로 이어지는 유태인 잔혹사가 어렵지 않게 머릿 속에서 재생된다. 같은 틀 안에서 항상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지만 볼 때마다 쉽게 감정이 이입되는 것은 전체주의의 가장 혹독한 희생양으로 부각되는 상징성과 절대 약자의 입장에서 그 시기를 보내야 했던 역사의 유사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유태인과 전쟁을 다루는 영화들의 반복적인 스토리라인과 구성이 이제는 지겹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중동을 무대로 과거 나치가 했던 것만큼 악날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유태인들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도 무관하지 않다. 노만 핀켈슈타인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에서 꼬집었듯이 이스라엘인들이 전방위에서 스스로가 피해자임을 확대하면서 오늘의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끊임없이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그들은 어쩌면 피해자의 영역에 있어어서는 신화적 존재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영화적 소재로서 가치가 넘치는 그들의 고단한 역사는 분명 앞으로도 쭉 재생산 될 것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괴물로 변할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가녀린 존재인지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까지 유태인 이야기를 다뤄온 숱한 영화들이 그랬듯이 <카운터페이터> 역시 소재는 '유태인과 나치'이면서 주제는 '휴머니즘'이다. 비슷한 영화들로 멀리는 <유로파 유로파>,<쉰들러 리스트>가 손에 잡히고, 가까이는 <피아니스트><인생은 아름다워>, <블랙북>이 떠오른다. 아우슈비츠로 환유되는 그들의 고생사가 이번에는 베른하트의 한 수용소로 옮겨졌다. 소재는 사상 최대 위조지폐 작전으로 알려진 <베른하트 작전>. 2차 대전 말기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겼다.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독일이 전세를 뒤엎기 위해 수감 중인 유태인들 가운데 인쇄전문가, 은행 직원 등 140명을 골라 베른하트 수용소에 위조 화폐 공장을 차리고 영국의 파운드와 미국의 달러, 여권 등를 찍어낸 사건이다. 주인공은 위조의 제왕으로 명성을 떨치며 화려한 삶을 살았던 살리(살로몬) 소로비치, 영화는 그의 감정선을 충실히 따라가며 전개된다.

애초에 위조업자로 이름을 날린 범죄자었던 살리는 나치에 잡힌 후에도 갖가지 임기응변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공산주의자 뿐만 아니라 짐승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내일'이지 자존심이 아니다. 나치의 초상화와 담벽에 선전화를 그리며 목숨을 유지하던 그는 베른하트 작전에 투입되면서 '편한' 수용소 생활을 시작한다. 생존을 위해 나치와 타협한 그이기에 그와 갈등하는 인물은 독일의 나치보다 신념을 중시는 동료 인쇄공 브루거다. 전쟁 전부터 아내와 반나치 활동을 해온 브루거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서 나치가 이기도록 도울 수 없다는 신념을 고집한다.

감독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살리와 브루거의 갈등 속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지만 위조 지폐를 만들어 당장 자신과 동료들의 목숨을 챙겨야 했던 살리. 하지만 그도 동료 브루거를 배신할 수 없는 이중고에 빠져있다. 반면 자신 때문에 동료들이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신념을 선택한 브루거 역시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에 당장의 담배 한 가치와 탁구 한 게임이 필요한 살리와 브루거를 둘러싼 다른 동료들의 입장이 겹치면서 갈등은 증폭된다. 생존과 죽음이 한 순간에 갈리는 수용소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그들의 고민은 어느 쪽이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평행선을 달린다. 오스트리아 출신 슈테판 루조비츠키 감독은 전쟁이라는 극한 순간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와 이성적 판단 간의 갈등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의 선택에 대해 평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살리 소로비츠의 회상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구조는 수용소 경험을 통한 살리의 변화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에서 자신감 넘치는 인물로 등장하는 살리는 마지막에는 극도의 혼란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팔뚝에 포로라는 주홍글씨를 새긴 그는 더이 상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수용소를 벗어난 이후 그의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왜? 수용소 안에서 자신과 동료들의 생명을 위해 나치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더 크게 유태인이라는 더 큰 집단을 배신한 것이었다. 목숨을 위해 건물 밖에서 들리는 처참한 소리들을 애써 외면해야 했고, 나치들의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견뎌야 했다. 또 나치가 패전한 후 그들을 고깝게 보면 유태인들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해야 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동료의 자살도 목도해야 했다. 동료들에게도 전쟁이 끝나면서 영웅은 더 이상 살리가 아닌 브루거가 된다. 전쟁 후에도 안전하게 내일을 살기 위해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라는 답을 갖게 된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개인은 나약해질 수밖에 없고 그 상황에서 내리는 선택 역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역사적 상황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식민지 시대, 핍박받았던 절대 다수의 민중과 생존을 위해 '친일'을 선택한 사람들을 모두 '피해자'라고만 단정지을 수 있을까? 어쩐지 영화 속 유태인의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우리의 현실에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양쪽 다 피해자라고만 단정짓기에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과 역사(구조) 간의 관계는 결론이 나지 않는 항상 갈등의 진행형이다.

기존 영화들이 그랬듯이 모두가 <피해자>임을 반복한 평이한 메시지가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짧은 시간 동안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면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중간중간 탱고 음악이 꽉 조였던 긴장을 풀어주고 <타인의 삶>의 제작진의 영상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무엇보다 지금 어수선한 시국에서 '개인'의 의미와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 나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