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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레몬 트리 (Etz Limo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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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트리'의 국내판 포스터를 보면 레몬 나무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로 원수지간인 두 나라의 여성들의 연대를 그린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자산을 침해당한 팔레스타인 여성의 법적 투쟁을 그린 영화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경계 사이에 있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레몬 나무 과수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팔레스타인 사람인 살마의 집 앞에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이 이사오게 되면서 수십 년간 평화로웠던 과수원에 철조망이 세워지고 경계탑이 건설된다. 자신이 살던 집 앞에 나타난 수많은 경호원과 군인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살마의 안전을 위협하지만 레몬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살마는 군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몬을 수집한다. 하지만 무성한 레몬 나무들 사이로 테러리스트들이 숨을 수 있다고 판단한 장관은 살마에게 보상금을 준다는 명목으로 레몬 나무들을 자르기로 결심한다. 아버지부터 내려오던 터전인 레몬 나무 과수원을 소중히 여기던 살마는 자신의 자산인 레몬 나무들을 지키기 위해 지아드라는 남자 변호사와 함께 거대한 권력자인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과 힘겨운 법적인 투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법정 드라마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근본주의자인 남자가 죽은 남편의 정절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살마를 위협하는 장면이나 이스라엘 군인들이 테러리스트를 잡는 다는 명목으로 살마의 집을 무단침입해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장면 등을 통해 살마의 힘겨운 법적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신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 때문에 팔레스타인 여성을 곤란에 빠뜨렸다고 생각하면서 팔레스타인 여성에게 미안해 하는 장관의 부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릇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양심의 갈등을 표현한다. 하지만 법정 드라마치고는 긴장감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이유를 들자면 외신에서 접하는 이스라엘의 폭압적인 대(對) 팔레스타인 정책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모습이 비교적 신사적으로 느껴져서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게다가 외국 국가들의 항의에 아랑곳 없이 주변국들에 대한 위협도 불사하는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이 단지 레몬 나무로 인한 위신 문제로 곤란을 겪는다는 설정은 조금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법정 드라마적인 전체적인 줄기보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건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인 살마가 우연히 옆 집에 이사온 이스라엘 장관으로 인해 자신의 터전을 마치 남의 땅을 드나들어야 하는 모습이었다. 이스라엘 장관이 옆 집으로 이사오면서 삶의 터전인 레몬 나무 과수원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살마는 자신의 집 앞에 설치된 철조망을 넘어가 생명의 위험을 불사하면서 레몬을 수집해야 한다. 자신의 터전이었던 공간을 마치 도둑처럼 넘어가야 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보여주는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무력으로 빼앗고 경계를 세워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한 이스라엘의 모습은 영화 속의 이스라엘 장관의 모습과 유사한 것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여성인 살마와 이스라엘 여성인 미라의 모습은 서로 다른 국적과 배경을 가진 여인들이지만 남성의 지배적 구조 속에서 고립된 여성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점도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살마는 자신의 남편이 병으로 죽은 이후로 홀로 자식들을 키운 여인이다. 살마는 엄연히 새로운 연인을 맞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남성 우월적인 이슬람 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 살마를 돕는 변호사인 지아드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를 연인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살마의 모습은 이런 불합리한 종교적 관습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미라의 경우 남부러울 것이 없는 부와 권력을 가진 국방부 장관의 아내이지만 그녀는 새장 안에 갇힌 새와 같은 존재이다. 국방부 장관의 부인에 대한 테러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경호원을 주변에 두고 집 주변에 철조망을 세우지만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보호 때문에 미라는 건너편의 여인과 대면조차 하지 못한다. 또한 국방부 장관인 남편의 권위에 맞는 아내가 되기 위해 정정보도에 사인을 하는 모습 등을 통해 자신의 양심적인 목소리 조차 낼 수 없는 여인의 안타까운 모습이 드러난다. 같은 처지에 있는 여인들이 경계망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증오에 찬 눈으로 응시하고 다른 사람은 그 눈을 회피해야 하는 모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라는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