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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2008 시네바캉스] 자본과 폭력이 만들어 낸 서부, <옛날 옛적 서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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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서부에서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1968년

남들 못지않게 영화를 많이 본 편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영화의 교과서처럼 불리는 거장 감독들의 작품들은 많이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다. 알프레드 히치콕, 페데리코 펠리니, 장 뤽 고다르, 잉마르 베리만, 구로사와 아키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등 끝이 없는 감독들의 목록을 시간날 때마다 정리해보곤 하지만, 아무래도 접할 기회가 없으니 목록은 계속 목록으로 남을 뿐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으로 불리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역시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처음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스파게티 식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코믹하게 그린 서부 영화의 패러디라고 생각했었다. 영화에 대해 잘 모르던 철없던 시절이었고, 나중에야 스파게티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임을 알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막상 영화 정보를 찾아보면 어느 서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 스틸 컷으로 나와 있어서, 도대체 서부 영화와 스파게티 웨스턴의 차이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했었다. 그렇지만 막상 작품들을 직접 스크린으로 만날 기회가 없으니 그 차이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때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회고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여름 고정 행사인 ‘시네바캉스 서울’의 프로그램들 중 하나였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자, 그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던 서부 영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회고전이 무척 반가웠다. 일요일 저녁의 서울아트시네마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 아이를 데리고 온 관객들이 있었는가 하면 외국인들까지 있어서 정말 극장으로 바캉스라도 온 기분이었다. 빈자리가 많아 보이던 자리들이 하나 둘 모여든 관객들로 채워졌다. 4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를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렜다. 설레는 맘으로 본 영화는 68년도 작품인 <옛날 옛적 서부에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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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지루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서부 영화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말을 타고 총격전을 펼치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황량한 벌판에 덩그러니 서있는 어느 기차역에서 주인공 하모니카(찰스 브론슨)가 세 명의 남자를 만나 총격전을 벌이는 것에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그런데 이 10여분이 넘는 오프닝 시퀀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네 남자의 총격전이 아니라, 하모니카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세 남자의 후줄근한 모습이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시퀀스가 바뀔 때마다 이야기를 자꾸 멈추려고 하는 것 같았다. 샤이언(제이슨 로바즈)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도 그렇다. 그 전까지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맥베인 부인(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은 샤이언이 등장하는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 대신 영화는 샤이언과 하모니카 사이에서 총을 두고 펼쳐지는 묘한 긴장감에 초점을 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연출이 처음에는 지겹게 느껴지다가도 뒤로 갈수록 점점 알 수 없는 흡입력이 생기는 것처럼 자꾸만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하모니카와 프랭크(헨리 폰다)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영화는 여전히 느린 호흡으로 이야기를 박진감 없게 진행시키지만, 대신 하모니카의 숨겨진 과거가 동시에 드러남으로써 어떤 비장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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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영화는 오히려 인물들이나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보다는 제목처럼 이들이 있는 ‘공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마지막은 맥베인 부인의 집이 있는 ‘스위트 워터’에 철도가 놓이고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처음의 스위트 워터는 그 이름(달콤한 물)과는 달리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공간에 맥베인 부인과 하모니카, 프랭크와 샤이언이 들어오면서 황무지는 점점 풍요의 땅으로 변해간다. 그 풍요는 네 사람이 지닌 각자의 욕망들이 낳은 것이기도 하다. 맥베인 부인과 프랭크에게는 ‘돈’이라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고, 하모니카와 샤이언에게는 ‘복수’라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네 사람의 욕망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진 스위트 워터는 자본과 폭력이 만든 서부를 뜻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옛날 옛적 서부에서>에는 착한 놈과 나쁜 놈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하모니카가 맥베인 부인을 프랭크 일파로부터 보호하려고 하여도 그건 그가 착해서가 아니라 프랭크에 대한 복수를 위해 맥베인 부인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탈옥수 샤이언은 악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어쩐지 능청스러운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선과 악의 기준마저도 애매하게 느껴질 정도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태도에서 벗어난 인물 캐릭터는 물론이고, 개척의 역사로서의 서부가 아닌 자본과 폭력으로 만들어진 서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옛날 옛적 서부에서>는 기존의 서부 영화와 확실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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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가 매력적인 이유는 ‘무(無)’에서 만들어진, 다시 말해 새로이 개척한 문명을 통해 이루어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서부에서는 인디언들의 문명이 존재했지만, 백인들로 인해 서부는 이전의 문명과는 단절된 채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냈다. 또한 그것은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서부에는 새로운 삶을 향한 꿈과 희망이 있었다. 동시에 그 뒤에는 돈과 부를 향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폭력이 존재하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한 동안 서부 영화라고 하면 흙먼지를 뒤집어 쓴 카우보이들이 총싸움이나 하는 영화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존 포드의 영화를 몇 편 보고,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까지 만나게 되면서 새삼 서부 영화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다. 아니, 나도 어느 새 서부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과 함께 쓸쓸히 말을 타고 스위트 워터를 떠나던 하모니카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 아마도 올 여름은 이 매력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덧] 서울아트시네마의 ‘2008 시네바캉스 서울’은 8월17일까지 계속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비롯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대표작 여섯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회고전 외에, 미국 인디영화 감독 할 하틀리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어 있다. <심플 맨>을 통해 알게 된 감독인데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대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전 영화를 상영하는 ‘명화 극장’과 인디스토리 주최의 단편영화 상영회, 일본영화 걸장 상영회, ‘애니충격열전’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작가를 만나다-홍상수 감독’ 행사는 토요일에 끝났다). 올 여름도 멀리 가지 못하는 피서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대신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