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페킨파의 영화인 '와일드 번치'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감상했다. '폭력의 피카소'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그의 대표작을 처음 보는 것이어서 과연 어떤 작품인지 궁금했는데 역시 그의 별명이 괜히 붙혀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무법자들이 쉴 새 없이 총을 쏘아대고 총을 맞고 쓰러지는 인물들의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교차되면서 보여준다. 어떤 면에선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에서 보여진 결투 씬보다 치열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물들 간의 결투를 극한까지 밀어 붙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와일드 번치'의 초반부는 그의 영화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텍사스의 어느 마을에 들어온 군인들이 말을 타고 등장하는데 그들 근처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기괴하게 느껴진다. 전갈을 개미들로 둘러쌓인 곳에 집어넣은 다음 불에 태워 죽이려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한편 군인들이 철도회사로 천천히 들어오는 과정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전달한다. 무뚝뚝한 표정을 짓는 군인의 대장이 할머니와 부딪히자 어느 새 친절한 얼굴로 바뀌어 그녀를 부축하는 모습은 잠깐이나마 그 긴장감을 풀어주지만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건물 위로 대기해 있는 무법자들의 모습은 불안감을 극대로 조성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철도회사에 들어간 군인들이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군인인 줄 알았던 그들이 사실은 철도회사를 털기 위한 무법자들임이 드러나고 그 위에서 대기 하고 있던 무법자들이 현금사냥꾼들임이 밝혀지면서 그들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눌 것을 보여준다. 그들 사이로 금주 모임 행사를 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동안 두 세력은 서로를 향해 총을 쏠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후 영화는 이들의 결투 장면을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는데, 보통 무법자들끼리 총을 쏴대는 다른 서부극 영화들과 달리 무법자들은 민간인들이 죽는 것에 아랑곳 없이 총을 쏴댄다. 클로즈업 쇼트로 보여지는 민간인들의 공포스런 표정과 그들 사이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인물들의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담은 쇼트는 전투의 공포감을 인상적으로 전달한다. 끔찍한 아수라장 속에서 인물들이 상대방을 총을 쏴대는 와중에 현금사냥꾼의 리더인 딕 숀튼은 말을 타려는 무법자의 우두머리인 파이크를 발견한다. 딕은 무방비에 있는 파이크를 보고 총을 쏘지 않은 체 잠시 머뭇거린다. 두 사람의 마주침은 후에 있을 두 사람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치열한 전투 끝에 두 세력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무법자 무리들은 전투 끝에 여섯 명만이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눈에 총을 맞은 파이크의 부하는 끝내 가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파이크는 더 이상 이동이 불가능한 그의 부하를 사살한 후 길을 재촉한다. 이후 다섯 남자는 멕시코의 경계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파이크의 옛 동료인 한 노인을 만난다. 이 곳에서 잠시 머문 다섯 남자는 서로의 재산 배분을 두고 갈등하게 된다. 작전의 실패를 들면서 파이크의 리더쉽을 지적하는 소치 형제와 그들을 조롱하고 깐쭉거리는 멕시코 인 엔젤 그리고 파이크와 더치 사이에서 흐르는 긴장감은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갈라설 수 인간들의 천박한 탐욕을 드러낸다. 하지만 주머니에서 훔친 금화를 풀어본 다섯 남자는 그들이 훔친 물건들이 가짜였음이 드러난다. 그들이 훔친 돈이 아무 쓸모 없음을 깨달은 다섯 남자와 노인은 화를 내며 분노하지만 이내 껄껄거리며 웃는다. 이처럼 다섯 남자들은 자신의 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서로를 향해 공격할 마음이 있는 탐욕을 가졌지만 한편으론 서로에 대한 감정을 금새 잊고 다시 합칠 수 있는 의기로운 심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현금 사냥꾼들은 무법자들과 싸워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뿐 실질적으로 잡은 무법자는 잔챙이들에 불과하다. 멍청한 현금 사냥꾼들은 마치 하이에나처럼 죽은 사람의 시체에 매달려 그들의 물건을 탐낼 뿐이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도덕적 양심이나 이성이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철도회사의 사장은 딕 숀튼을 찾아가 많은 돈을 투입하고도 도둑들을 잡지 못한 딕 숀튼을 비난한다. 딕은 형편없는 현금 사냥꾼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에게 더 좋은 베테랑 사냥꾼들을 고용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철도회사 사장은 그의 약점을 건드리면서 기한내에 서둘러 무법자들을 잡도록 협박한다. 영화는 철도회사의 사장의 대사와 무법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파이크와 딕의 숨겨진 관계를 드러낸다. 사실 이 두 사람은 한때 동료 였지만 그들의 아지트를 습격한 보안관들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딕만이 감옥에 갇히게 된다. 결국 딕 숀튼은 자유의 댓가로 파이크를 잡아야 한다. 이처럼 무법자들을 처단하는 현금 사냥꾼들의 모습은 악행을 저지르는 무법자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이 드러난다. 철도회사의 사장은 자신이 고용한 남자의 약점을 이용해 딕을 닦달해대고, 딕의 부하들은 파이크의 부하보다 더할 정도로 흉폭하고 제멋대로인 모습을 보여준다. 딕 숀튼은 이런 추악한 인간들과 일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만 생존을 위해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옛 동료인 파이크를 잡기 위해 무법자들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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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크 일당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하고 미군의 급료열차를 털어 마지막으로 한탕을 지을 곳을 물색한다. 엔젤의 고향인 멕시코의 한 마을에 들어선 파이크 일행은 그 곳에서 융슝한 대접을 받는다. 영화는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해방군인 판초 비야를 소탕하려는 군벌 세력인 마파치에 의해 마을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약탈 당했음을 알려준다. 엔젤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연인이 자신을 배신하고 마파치와 함께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후 마파치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 오른다. 이후 파이크 일행은 멕시코의 한 도시에서 증기 자동차를 끌고 오는 장군 일행들을 발견한다. 자동차를 호기심있게 바라보던 파이크는 장군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 곳에서 머물게 된다. 여자들을 끼고 술을 마셔대는 장군의 모습을 본 파이크 일행들의 대화는 장군과 그의 부하들이 무법자들보다 못한 악당들임을 드러낸다. '우린 저들과 같은 도적이지만 적어도 우린 사람의 목을 메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더치의 대사는 멕시코 군벌의 폭력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평온해 보이던 잔칫집 분위기는 엔젤로 인해 깨지게 된다. 그 곳에서 자신의 연인이었던 테레사를 발견한 엔젤은 그녀에게 돌아와달라고 설득하지만 그녀는 권력자인 마파치의 품에 안긴다. 분노한 엔젤은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순식간에 벌어진 엔젤의 총격으로 인해 파이크 일행은 군인들에게 포위당하게 된다.
장군을 공격할 의도가 없었음을 간신히 설득한 파이크 일행은 우연히 그 곳에 있던 독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파이크 일행을 통해 멕시코 군대의 개입없이 미국 군대에 타격을 주려고 하는 독일인들은 그들에게 미국 군인들의 무기를 훔쳐와 달라고 요청한다. 애초에 군인들의 급료를 훔치려 했던 파이크는 독일인들의 조건을 수락하고 그 댓가로 거액의 금화를 받기로 결정한다. 파이크는 무기를 실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공급받기 위해 잠시 정차한 사이 뛰어난 계획과 순간적인 기지로 그들을 잡으러 기차에 타고 있었던 딕 숀튼의 무리들을 따돌리고 무기들을 빼돌리는데 성공한다. 한 때 말 편자를 제대로 밟지 못하고 낙마해버린 파이크를 조롱하던 소치 형제들은 작전이 성공한 후 파이크에게 술병을 건넨다. 마치 그를 진정한 리더로 인정하듯이 소치가 파이크에게 술을 건네고 한 명씩 술을 나눠 먹는 장면은 예전의 적대감을 잊고 서로를 인정하는 남자들의 호탕한 의기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무기를 얻은 파이크는 그들을 배신할지도 모르는 멕시코 군인들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그들을 협박한다. 두 명식 짝을 이뤄 돈을 받고 무기를 조금씩 건네는 방식으로 합의로 본 파이크 일행들은 하나씩 돌아옴으로써 이득을 얻게 되지만 엔젤과 더치가 자신들의 몫을 받는 순간 멕시코 군인들은 그들을 포위해 자신의 댓가로 총 한 상자를 해방군에 넘겨준 엔젤을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더치는 자신의 동료인 엔젤을 이 곳에 놔두면 잔인하게 살해당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가 엔젤을 구출하기 위해 할 수단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더치는 엔젤이 멕시코 군인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더라도 그 자리를 피하는 수 밖에 없을 뿐이다. 한편 노인이 딕 숀튼 일당으로부터 추격당하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목격한 파이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버리고 마파치의 도움을 받아 딕의 추격을 뿌리뽑기로 결심한다. 파이크 일행은 마파치의 막사에서 차에 끌려다니는 엔젤의 비참한 모습을 목격하지만 그를 구할 방도가 없음을 아는 그들은 엔젤을 외면한다. 마을에 머문 파이크 일행은 엔젤을 잊기 위해 각자 다른 행동을 취한다. 더치는 마을 바깥에서 나무를 깎으며 시간을 보내고 파이크와 소치 형제들은 돈을 주고 여자와 관계를 맺으려 한다. 하지만 파이크는 옷을 갈아 입으며 고뇌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게다가 방에서 울려퍼지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자 파이크는 끝내 그 곳을 빠져 나오기로 결심한다. 여인에게 돈을 쥐어준 후 파이크는 소치 형제에게 가자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간다. 세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본 더치는 파이크가 엔젤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든 사실을 알고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따라간다.
북소리가 조금씩 고조되면서 네 남자는 멕시코 군인들이 깔린 막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마파치를 목격한 파이크는 그에게 총을 들이대면서 엔젤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지만 술에 취한 장군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엔젤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엔젤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파이크 일행은 장군을 향해 총을 쏨으로서 그를 살해한다. 순간 시끄러웠던 막사는 한순간 침묵으로 조용해진다. 이후 최후를 각오한 듯한 더치의 웃음 소리가 울려퍼지고 파이크는 장군의 참모들을 향해 총을 쏜다. 파이크 일행에게는 어떠한 정치적 신념이나 국가에 대한 애정은 없었지만 자신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 그의 복수를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목숨을 내던지며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군인들을 상대하기 시작한다. 마파치의 군인들과 파이크 일행 간의 총대결은 샘 페킨파의 폭력의 미학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는 파이크와 더치, 소치 형제들의 극한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며 여러 방의 총을 맞으면서도 기관총을 놓치지 않은 체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는 파이크의 마지막 모습은 처절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네 남자와 수십 명의 군인들과의 싸움 끝에 남은 것은 수많은 시체들과 하늘 위로 날라다니는 독수리 떼뿐이다. 이러한 끔찍한 광경을 더욱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은 딕 숀튼의 무리들이다. 자신들이 추적하던 네 명의 남자들의 시체를 목격한 현금 사냥꾼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기기 위해 인간적인 배려 없이 시체를 끌어간다. 독수리들은 비록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자연적인 법칙에 의해 인간의 시체를 쪼아 먹지만 현금 사냥꾼들은 동물보다 도덕적으로 못한 탐욕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부를 위해 시체에서 금니를 빼갈려는 모습은 탐욕으로 인해 타락해버린 인간들의 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딕 숀튼만이 기관총을 쥔 체 죽은 파이크의 총을 자신의 허리에 꽂아 그의 추억을 기릴 뿐이다. 딕 숀튼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이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현금사냥꾼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사라져 버리고 무덤 같은 곳에 딕 혼자만이 남게 된다. 이 때 해방군과 노인이 나타나 딕에게 말을 건넨다.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체 그 곳에 주저앉던 딕은 자신과 함께 하자는 노인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친구를 쫓아야 했던 딕은 이제 해방군이 되어 이상을 위해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해방군들의 이동모습과 함께 파이크를 비롯한 다섯 명의 얼굴이 오버랩된 마지막 장면은 황금같은 물질적인 실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남자들의 모습을 강렬하게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