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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それでもボクはやってな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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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시 댄스>(1989)와 <으랏차차 스모부>(1992), 그리고 국제적인 히트작 <쉘 위 댄스>(1996)로 유명한 수오 마사유키 감독이 웃음기가 전혀 없는 새 영화를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11년만에 내놓은 작품이 전작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법정 드라마라니 좀 의아하기도 하고, 그만큼 영화의 내용도 궁금하더군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아침 러시아워의 지하철에서 치한으로 몰린 어느 청년의 법정 투쟁기입니다. 무슨 음모나 미스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피해 여학생은 주인공 텟페이(카세 료)를 치한으로 지목해 붙들었고 그는 죄를 인정하고 빠른 시간 내 풀려나는 대신 '내가 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주인공이 성추행을 했느냐 안했느냐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피의자를 다루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의 태도입니다. 일단 피의자로 지목하면 99.9% 유죄를 선고하고야 마는 현 사법제도의 모순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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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2시간 반 가량의 러닝 타임이 훌쩍 지나가게 만드는 것은 역시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내공입니다. 결코 재미있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의 영화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지루할 짬을 주지도 않는 작품이랄까요.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등장인물들의 대화 등 통해 설명해주는 세심한 배려는 대중영화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같은 시간에 다른 진짜 치한범이 경찰에 붙들려 완강하게 자기 죄를 부인하다가 결국 혐의를 인정하고 합의금을 치르면서 당일 오후에 일찌감치 풀려나는 모습은 주인공이 가게 될 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칫 이 영화를 본 이후에 '만일 당신도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되면 완강하게 무죄를 주장하다가 오랜 시간 고생하지 말고 빨리 빠져나오는 길을 택하라'고 현실적인 권고를 하는 것으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을 만큼 주인공의 법정 투쟁은 무척이나 길고도 험난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도 약간 작위적으로 보일 만큼 결연한 목소리를 담아야만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목이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니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정황은 100% 유죄인데 그래도 주인공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고, 그리하여 진실 여부를 관객에게 묻고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실제 영화는 좀 더 현실적인 톤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이더군요. 논점이 약간 다르긴 합니다만 사형제도에 관한 법정 드라마로 팀 로빈스 감독, 숀 펜, 수잔 서랜든 주연의 <데드맨 워킹>(1995)이 있었고, 알란 파커 감독, 케빈 스페이시, 케이트 윈슬렛, 로라 리니 주연의 <데이비드 게일>(2003) 도 인간의 판단에 의존하는 사법제도의 불완전함을 주장하는 작품이었죠. 그러나 이들 작품과는 달리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감정적 선동이나 반전을 통한 극적인 효과를 의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무죄 선고의 희망이 판사의 판결문 낭독과 함께 삽시간에 무너지는 부분에서는 나름대로 극적인 면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고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영화는 사건의 발생으로부터 1차 판결을 받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촘촘하게 재연하면서 관객들이 전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죄가 없는 사람조차도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드라마틱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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