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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린다 린다]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빌어먹을 세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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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린다 린다 (リンダ リンダ リンダ)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2005년 작품


수능을 마친 다음 나는 베이스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왜 베이스였냐 하면 기타는 여섯 줄인데 반해 베이스는 네 줄이라서 연습하기 쉬워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어쩌면 은연중에는 나름의 쇼맨십이 요구되는 기타보다는 묵묵히 음악을 받쳐주는 베이스가 성격상 더 끌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입학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었다. 그래서 학부 소모임으로 있는 록 밴드에 가입하였다. 베이스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배운 걸 어딘가 써먹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어느 날 밴드 선배로부터 축제 공연을 준비해야 한다며 모임 연락이 왔다. 모임에 갔더니 선배는 공연 때 연주할 노래 다섯 곡을 정했다며 그 중 한 곡을 내게 주었다. 스매싱 펌킨스의 ‘Today’이었다. 내 실력이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노래를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시키기만 하는 선배의 행동에 섭섭하였다. 하지만 그냥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 전 며칠 동안 연습을 하였는데, 나는 한 곡이지만 그래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2000년 5월, 그렇게 우리는 무대 위에 올랐다. 잔디마당이 있는 곳에 조그맣게 설치된 무대였다. 주변에서는 우리 학부에 소속된 학과들의 주점이 열리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무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 무대에 오르는 우리들의 얼굴에는 다들 긴장한 표정이 가득하였다. 긴장을 안고 시작된 공연, 그런데 첫 곡을 연주하자마자 무대 근처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더니 무대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 음악보다는 다들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술 때문이라고 하여도 우리가 연주하는 음악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우리도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새 내가 무대에 오를 순서가 되었다. 뜨거운 조명이 머리 위에서 내려쬐고 있었고,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 친구도 있었고, 95학번 형도 있었다 ― 을 보는데 정말이지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연주를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렇게 연주를 끝내고 무대를 내려오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말 그대로 ‘행복함’ 그 자체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다 그랬다. 공연을 마친 다음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근처에 자리를 깔고 앉아 다같이 술을 마셨다. 그때만큼 우리 얼굴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다음에는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를 연주하자는 둥, 이제는 드림 씨어터를 하자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필름이 끊겼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때처럼 사람들이 열광하는 공연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의 기억 때문에 대학 시절 내내 같이 합주를 하고 공연을 했다. 힘이 들 때면 그때의 기억을 같이 이야기하며 기운을 내기도 하였다. 그 경험만큼은, 그 누구도 쉽게 겪어 보지 못할 대학시절의 경험일 것이라고, 나는 아니 우리는 굳게 믿고 있다.


즐겨 찾던 극장 CQN이 갑작스럽게 폐관을 한다는 소식에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2년 전 같은 극장에서 본 <린다 린다 린다>였다. 예전에 봤을 때는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상쾌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본 <린다 린다 린다>는 신기하게도 영화 전체를 무기력함이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영화는 “우리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순간을 어른으로 변신한 순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여학생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 무표정한 여학생의 얼굴에서부터 무기력함의 그림자는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그 무기력함은 복도를 뛰어다니며 케이(카시이 유우)를 찾는 쿄코(마에다 아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 동안 케이와 쿄코, 노조미(세키네 시오리)는 그동안 축제 공연을 위해 다른 친구들과 연습을 해왔는데, 갑작스런 한 멤버의 부상과 멤버들끼리의 다툼으로 공연을 못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런 소녀들의 눈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 송(배두나)이 들어오고, 그렇게 네 소녀들은 모여 3일 동안 공연을 위해 밤을 지새워가며 연습을 한다. 그런데 도대체 그녀들은 왜 공연을 하려는 것일까? 그녀들은 당연히 공연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고등학교 축제를 하면 야끼소바와 크레페를 만들어 팔아야 하고 유령의 집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발적으로가 아닌 의무감에 무언가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허전함이 느껴지곤 하는데, <린다 린다 린다>에서 내가 느낀 무기력감은 그런 허전함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원래 밴드 멤버인 케이와 쿄코, 노조미보다는 뒤늦게 밴드에 참여한, 정말 하는 일이 하나 없었던 송이 더 열심히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한일 교류 문화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송은 정말이지 의욕이 없는 무기력함 그 자체였지만, 그런 송이 공연 당일 뒤늦게 학교에 도착해 비를 맞으며 공연장으로 뛰어가다 넘어지는 모습에는 우습다는 생각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같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공연 전날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연습을 하던 송은 잠시 연습실을 나와 아무도 없는 공연장을 찾아간다. 텅 빈 무대 위에서 송은 마치 유명한 록 밴드의 리더라도 되는 듯 멤버 소개를 한다. 하지만 송이 바라보는 공연장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을 뿐이다. 의욕에 가득한 송, 그리고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텅 빈 공연장. 그것은 마치 예고도 없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무기력함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난다. 열심히 해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세상. 그래서 우리들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보다는 해야 할 일에 더 익숙해진다. 선생님도 그런 학생들의 모습에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도 그런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저 소녀들은 공연을 마친 다음 또 다시 무기력함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고민하며 지낼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공연을 준비하던 3일 동안의 기억만큼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고, 그런 기억들로 힘을 얻어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영화의 마지막, 네 소녀가 블루 하츠의 ‘끝나지 않는 노래(終わらない歌)’를 연주할 때 영화는 비 내리는 학교의 풍경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쓸쓸함이 느껴질 만한 텅 빈 풍경들이지만 노래들 때문인지 그렇게까지 슬프게 보이지는 않는다.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빌어먹을 세상을 위해 /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모든 쓰레기들을 위해서” 이 노래가 나오는 순간, 2000년 5월의 그 공연 생각이 나서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펑크(punk)의 모토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저항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힘이 들더라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밖에. 끊임없이 꿈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リンダリンダ (영화 <린다 린다 린다> 중)
 

終わらない歌 (영화 <린다 린다 린다> 중)

 

[덧1] 원래는 CQN 폐관에 대한 아쉬움을 담은 글을 쓰려고 했는데 영화에 너무 몰입해서 결국 영화 이야기를 쓰고 말았다. CQN 폐관은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코아아트홀, 씨네코아에 이어 CQN까지, 무언가 갈 곳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며칠 동안은 폐관을 앞에 둔 극장에 대한 챠이밍 량의 <안녕, 용문객잔>이 머리 속을 떠다닐 것 같다.


[덧2]  2년 전 처음 영화를 보고올린 글을 보니 그때는 송과 다른 세 소녀 사이의 ‘우정’에 초점을 두고 본 것 같다. 친구가 없다고 혼자 외로움 타던 때라서 그런가보다. 어쩌면 오늘 영화를 보며 무기력감을 떠올린 것은 지금 내 처지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덧3] 사실 영화 보면서 일본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봤는데 글에다 제대로 담아낼 수 없어서 그냥 쓰지 않았다. 소녀들이 80년대의 펑크 밴드 블루 하츠의 노래를 연주하는 것도 그렇고, 케이의 꿈에 라몬스가 등장하는 모습 등에서 지금 시대의 무기력함, 그리고 지나간 시대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아무 말 못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어쩌면 세상에 무관심한 일본 젊은이들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일본 기성세대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봤는데 나는 어쨌든 일본 사회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패쓰.

 
 

2005년 7월20일 SHIBUYA-AX에서 열린 공연 중에서 (リンダリンダ + 終わらない歌)